다석 유영모는 기독교계에서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특징은 우리말로 철학하기에 있다.


또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정식으로 졸업증을 써준 사람은 박영호씨 한명 뿐이지만

그외에 김흥호 목사, 험석헌, 임락경, 이현필등을 가르쳤다.



만년에 구기동 저택을 거니는 다석 유영모



참조

다석 유영모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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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몬드 투투






198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인물이다.


최근에 <Joy 기쁨의 발견> 이라는 책을

달라이 라마와 함께 합작하여 출판했다.


인종차별문제로 남아프리카가 고심할 때

진실과 화해 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과거 청산을 위해

힘쓰셨다. 이때의 일들은 <용서없이 미래없다>라는 저서에 나와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분들이 많아져서 깔끔하게 과거 청산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님.

두 분 다 에너지장을 보았을 때, 영적 성취를 이루신 분들이다.


달라이라마의 에너지장

데스몬드 투투의 에너지장

위키: 데즈먼드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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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르시' (Ramana Maharshi, 타밀어: ரமண மகரிஷி1879년 12월 30일 ~ 1950년 4월 14일) 또는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ish)는 인도의 힌두 철학자이다.

'큰스승'(大師), '바가반', '아루나찰라의 현인'이라고 불리며 비이원론(Advaita, Non-Duality)과 마야에 대하여 샹카라와 같은 견해를 가졌는데, 이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침묵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진리를 찾는 방법으로 '비차라(Vichara, Self-enquiry : 진아 탐구)를 권하였다.

인도 남부 마드라스 마두라이의 중류층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 신비주의와 종교에 관한 서적, 특히 인도 남부의 시바파 성자들의 전기와 중세의 신비주의 시인인 카비르의 전기를 읽었다. 그는 세계가 창조될 때 시바 신이 오늘날 순례자들의 성지가 되어 있는 아루나찰라 산의 불기둥 속에서 솟아나왔다는 전설을 듣고, 아루나찰라 산에 마음을 빼앗겼다. 17세 때 갑자기 죽음의 공포를 심하게 느끼고, 가만히 드러누운 채 몸이 딱딱하고 차가운 시체로 변해가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neti-neti)라는 전통적 수행법에 따라 자아탐구를 시작했다. 그는 "나는 누구냐?"고 스스로 묻고 "나는 육체가 아니다. 육체는 결국은 썩어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도 아니다. 두뇌는 육체와 함께 썩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격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다. 인격과 감정도 역시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고 깊은 의문을 가졌다. 그 깊은 자아에의 탐구는 그를 초월하는 의식상태로 이끌었는데, 희열을 느끼는 이 상태를 힌두 철학에서는 '사마디'(samādhi) 즉 삼매(三昧)라고 부른다. 그는 이후 고향 마을을 떠나 아루나찰라 산으로 가서 수행자가 되었으며, 그 후 인도에서 가장 젊은 구루의 한 사람이 되었다.

라마나 마하르쉬에게 크게 감명받은 영국인 폴 브런턴이 〈인도의 신비를 찾아서 My Search in Secret India라는 책을 발간하자,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라마나 마하리쉬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였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죽음과 악은 '비차라'로 쫓아 버릴 수 있는 환상일 뿐이며, '비차라'를 실천하면 참된 자아인 진아(Atman, True Self)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되풀이되는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비차라'를 실천하거나 박티(헌신과 신애)를 실천하면 된다고 하였으며 이 두가지가 같은 결과로 이끄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


가장 강조한 수행법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수행법으로

마치 소에게 여물을 내밀어 이끌고 가듯이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명상가로서 진실하고 깊은 수준에 도달했던

침묵의 성자 라마나 마하르쉬.


그의 사상과 정취를 느끼는데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라마나_마하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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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암스님은 조선조 5백년 역사의 막이 서서히 내려지던 1885년 12월 1일 황해도 백천군 해월면 해암리에서 최사홍(崔四弘)과 전주 이(李)씨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속명은 순천(順天).

  11세 때인 1895년 부친상을 당해 이듬해 출가(出家)를 결행, 경기도 양주군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삭발한 이래 줄곧 수행에 전념해왔다.

  16세 때인 1900년 이보암(李保庵)스님을 은사로, 표금운(表錦雲)스님을 계사(戒師)로 득도하고, 27세 때인 1911년 서해담(徐海曇)스님을 계사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성월(性月)스님 회상(會上)에서 정진하며 화두(話頭)를 간택받았다. 

  그 뒤 만공(滿空), 혜월(彗月), 용성(龍城)스님 등 당시 선지식들을 모시고 용맹정진, 근 6년의 운수행각(雲水行脚)과 좌선(坐禪)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부른 깨달음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語默動靜句 箇中誰敢着
  問我動靜離 卽破器相從

  이를 자유로운 해석으로 우리글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 내게 말도 침묵도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여의고, 한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
  이무렵 스님은 묘향산 상원사(上院寺) 주지와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정암사)주지를 잠깐씩 역임하기도 했으며 45세 때인 1929년, 당시 수덕사 조실(祖室) 만공(滿空)스님으로부터 전법게(傳法偈)와 혜암(惠菴)이란 법호를 받고 법통을 이었다.

  만공스님이 내린 전법게는 


구름과 산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또한 대가(大家)의 가풍(家風)도 없구나
이와 같은 글자 없는 인(印)을
혜암 너에게 주노라.

  雲山無同別
  亦無大家風
  如是無文印
  分付惠菴汝


만공스님의 인가

 덕숭총림 초대 방장 혜암현문(慧庵玄門, 1884∼1985)스님은 1929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을 받은 뒤에도 무섭도록 철저한 정진을 했던 선지식이다. 1943년 만공스님과 간월도로 가는 배 위에서 나눈 법담은 유명하다. 그 자리에서 만공스님은 혜암스님에게 “저 산이 가는가? 이 배가 가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혜암스님은 “산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이 “그러면 무엇이 가는가”라고 묻자 손수건을 말없이 들어 보였다. 이에 만공은 ”자네 살림살이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며 인가해 주었다고 한다. 혜암스님은 1956년 세수 72세 때 수덕사 조실로 추대돼 덕숭산에 주석하며 30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 전통선의 진수를 전하기 위해 1984년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석해 한국불교를 미국에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만공스님은 일제시대 때에 간월도로 가서

우리나라의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위한 천일기도를 입재했습니다. 

아마 그곳에 갈무렵으로 보이네요.


 


참고

혜암선사-행장

혜암현문

혜암스님의 에너지장

만공스님의 천일기도


저서

<생사해탈의 관문 선문촬요>

<바다 밑의 진흙소 달을 물고 뛰네> 법어집

달마대사 혈맥론(e뭣고 선어록총서 1)

달마대사 관심론(e뭣고 선어록총서 2)

보조국사 수심결(e뭣고 선어록총서 3)

보조국사 진심직설(e뭣고 선어록총서 4)

선경어(e뭣고 선어록총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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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뭄바이에서 1897년 3월 15일 하누만 자얀띠 날에 태어났다.

몹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어느 회사 사환 직을 하다가 그만두고 

담배 장사를 하면서 평범한 상인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37세 때 친구의 안내로 스승인 싯다라메쉬와르 마하라지를 만나 수행의 길에 들어선다. 

스승을 만난 지 3년 만인 1936년, 40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 점차 세상에 알려져 

그의 집에는 구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81년 9월 8일 암으로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그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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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kins Review, 가장 영향력 있는 현존 영적 지도자 100 명 발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심오한(Esoteric) 기관에서 
현존하는 인물 중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의 인물 발표

(런던=뉴스와이어) 2011년 03월 30일

 -- Watkins Review는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의 현존인물을 선정 발표하였다. 

영적 지도자 100인 중에는 Dalai Lama (2위), Deepak Chopra (5위), Nelson Mandela (19위), 교황 (34위)이 포함되었으며 1위는 베스트 셀러 작가 Eckhart Tolle가 차지했다. 이번 봄 발행본에는11페이지에 걸쳐 이들 100명의 약력이 소개된다. 

Watkins Review는 설립된 지118년이 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적 서점인 Watkins Book이 판매, 발행하는 잡지이다. 이 잡지는 달라이 라마를 칭송하였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 처분된 중국을 제외한 세계 Apple App 스토어에서 구매할 수 있다.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을 매년 발표하고 있고, 포브스지는 부자 리스트와 유명인 리스트를 포함하여 여러 리스트를 발표한다. Watkins Review는 이 중요한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의 생존인물 리스트의 발표가 너무나 늦었다고 생각한다. 

Watkins Review는 영적 지도자 100명의 목록를 처음 소개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며 이 기회에 현대 영성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 되길 바란다. 

선정 시 여러 요소를 고려하였으며 이중 주요 요소는 아래 3가지이다. 
1) 현존 인물 
2) 세계적으로 특별하면서도 영적으로 공헌을 한 인물 
3) 구글에서 자주 검색되었으며 Nielsen Data에 자주 등장하며 블로그 공간에서 두루 조명 받은 인물 

사람들이 구글에 투자하는 시간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구글 상에서 인물 검색은 마치 일종의 디지털 투표를 하는 것과 같으며 얼마나 사람들이 그 인물을 찾았는지를 보여준다. 
  
영적 100인 리스트의 요약 
남성: 76% 여성: 24% 
평균연령: 67 세 
최고령: 104 세(Kyozan Joshu Sasaki) 
최연소: 30 세(Jeff Foster) 
 

1. Eckhart Tolle 에크 하르트 톨레,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2. Dalai Lama 달라이 라마 <용서>
3. Dr Wayne W. Dyer 웨인 다이어 박사 
4. Thich Nhat Hanh 틱낫한 <화>
5. Deepak Chopra 다픽 초프라 
6. Louise L. Hay 루이즈 L. 헤이, <원하는 걸 얻으려면, 자신부터 사랑하라.>
7. Paulo Coelho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8. Oprah Winfrey 오프라 윈프리
9. Ken Wilber 켄 윌버, <통합비전>
10. Rhonda Byrne 론다 번, <시크릿>
11. James Redfield 제임스 레드필드 <천상의 예언>
12. Neale Donald Walsch 닐 도날드 윌쉬 <신과 나눈 이야기>
13. Doreen Virtue 도린 버츄 <천사와 함께하는 치유> ~ 엔젤 테라피스트라고 하네요.. 특이하네요. 천사무당????
14. Alejandro Jodorowsky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15. Richard Bach 리처드 바크, <갈매기의 꿈>, <꿈꾸는 마리아>, <기계공 시모다>, <영원의 다리>
16. Alex Grey 알렉스 그레이, 영적 그림을 그립니다. 검색하면 별의 별 그림을 다 볼 수 있습니다.
17. Byron Katie 바이런 케이티, <네가지 질문>,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 <사랑에 대한 네가지 질문>
18. Masaru Emoto 마사루 에모토, <물은 답을 알고 있다>
19. Nelson Mandela 넬슨 만델라,
20. Bernie Siegel 버니 시겔, 
21. Caroline Myss 캐롤린 미스, <사랑+의술=기적>
22. Brian Weiss 브라이언 와이스,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기억>, <전생요법>
23. Mantak Chia 만탁 치아,  <치유에너지 일깨우기>
24. John Gray 존 그레이,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
25. Gregg Braden 그렉 브레이든, <디바인 메트릭스>,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 
26. Stephen R. Covey 스티븐 코비,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
27. Marianne Williamson 메리엔 윌리엄스, 전도사이자 선교사
28. Desmond Tutu 데스몬드 투투, 주교 <네이버캐스트-아프리카 인권운동의 정신적 지주>
29. Mata Amritanandamayi 마타 암리타난다마이, 인도의 안아주는 성녀
30. Philip Berg <영혼의 수레바퀴> , <조하르의 본질>
31. Ervin Laszlo 어빈 라즐로, <비전2020>, <인간의 미래는 행복한가>
32. Andrew Harvey 앤드류 하비, <라다크에서 찾은 부처>
33. Don Miguel Ruiz 돈 미겔 루이스, <두려움을 넘어서는 지혜>, <오늘이 내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사랑하라 두려움없이>
34. Joseph Alois Ratzinger 요제프 알로이그 라칭거 교황, 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5. Krishna Das 크리슈나 다스, 명상음악가
36. Drunvalo Melchizedek 드룬발로 멜기세덱,  지축이동설
37. Sai Baba 사스야 사이 바바,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사이바바 사원.>
38. Jack Kornfield 잭 콘필드,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 <깨달음 이후의 오두막>
39. Pema Chodron 페마 초드론, 승려
40. T.K.V. Desikachar 요기
41. Esther & Jerry Hicks  에스더 힉스와 제리 힉스, <끌어당김의 힘>
42. Dan Brown 댄 브라운, <디지털 포트리스>,<디셉션 포인트>, <천사와 악마>,<다빈치 코드>,<로스트 심벌>
43. Z'ev Ben Shimon Halevi 카발리스트, 위키(영문)
44. Diana Cooper 다이아나 쿠퍼, 힐러, 명상음악가
45. Ram Dass 람 다스 (님 까롤리 바바의 제자), <성찰>,<신에 이르는 길>
46. Andrew Weil 엔드류 와일 아기젖병이 나온다?? 통합의학을 실천한다고 한다. 네이버백과사전
47. Satya Narayan Goenka 샤트야 나라얀 고엔카, 위빠사나 명상의 대가. 담마를 전파하고 있다. 담마코리아에서 고엔카의 위빠사나 열흘수행을 할 수 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48. Jon Kabat-Zinn 존 카밧 진 MBSR의 창시자. Mindfulness Meditaion for Pain Relief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치유>
49. Alan Moore 앨런 무어 만화가, <왓치맨>, <브이 포 벤데타>, <프롬 헬>
50. Dan Millman 댄 밀먼 <평화로운 전사> 이 저서는 영화로도 출시되었다.
51. Bruce Lipton 브루스 립톤, 과학자, 과학과 영성
52. Peter Kingsley  피터 킹슬리
53. Karen Armstrong 카렌 암스트롱, 영화인
54. Judy Hall 주디 홀 <크리스탈 바이블>
55. Colin Wilson 콜린 윌슨 <풀리지 않은 세계의 불가사의>, <아웃사이더>
56. Joscelyn Godwin 대학교수, 카발리스트, 이름이 신의 승리라니.. 아이러니다.
57. James Lovelock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가이아>,<가이아의 복수>
58. Satish Kumar 사타쉬 쿠마르, <부처와 테러리스트>
59. Shakti Gawain 샥티 거웨인, <나는 날마다 좋아지고 있다> <위즈덤 다이어리>
60. Elaine Pagels 일레인 페이절스, <사탄의 탄생>,<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61. Kyozan Joshu Sasaki 사사키 일본 승려
62. Gary Zukav 게리 주커브 <영혼의 의자>, <소울 스토리>, <감정을 과학한다>
63. Erich Von Daniken 에리히 폰 다니켄, 스위스의 저자
64. David Deida 
65. Oberto Airaudi ‘Falcon’ 
66. Stuart Wilde  스튜어트 와일드
67. John Bradshaw  존 브래드 쇼 <상처받은 내면아이>
68. Jeff Foster 제프 포스터
69. Patrick Holford  패트릭 홀도프  최적 영양 연구소, 런던의 최적조건 영양회 의 창시자 
70. Andrew Cohen 엔드류 코헨
71. Vladimir Megre 블라디미르
72. Thomas Cleary 토마스 클레어
73. Daniel Pinchbeck  다니엘 핀치백
74. Jonathan Goldman 조나단 골드만 홈페이지 치유의소리
75. Sonia Choquette 소니아 
76. Seyyed Hossein Nasr 호세인
77. Mother Meera 마더 미라 홈페이지
78. Barefoot Doctor 맨발의의사
79. Richard Bandler 리처드밴더
80. Robert Bly 로버트 Bly  (시인)
81. Adyashanti  아댜 산티 홈페이지
82. Sogyal Rinpoche 송갈 린포체
83. Li Hongzhi  리홍지 파륜궁창시자
84. Sri Bhagavan 스리 바가반
85. Rupert Sheldrake 루퍼트 혹부리 오리
86. John & Caitlin Matthews 케이틀린 & 존 매튜스
87. Chogyal Namkhai Norbu Chogyal Namkhai Norbu
88. Kenneth Grant 케네스 그렌트, 기사
89. Stanislav Grof 스타니슬라프
90. James Hillman 제임스힐맨
91. Clarissa Pinkola Estes Clarissa Pinkola Estes 
92. Stephen Levine 스티븐 레빈 (작가)
93. Candace Pert Candace Pert
94. Barbara Ann Brennan 바바라 앤 브랜넌 <기적의 손치유>
95. Coleman Barks 콜맨박카스 (시인)
96. Robert Thurman 로버트 트루만
97. B.K.S Iyengar   B.K.S Iyengar
98. William Bloom 윌리엄 블룸
99. Lynne McTaggart  린 막타거트
100. Marion Woodman 마리온 우드맨



Watkins Books 는 1893년 런던에서 설립되었으며, 현존하는 영국의 비밀스런 서점 중 가장 오래된 대형 서점이다. www.watkinsbooks.com. 19-21 Cecil Court, London, UK, WC2N 4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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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전(密傳)의 특성이 매우 강하여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대에도 엄연히 카발라의 스승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스승 아이반호프는 스스로

'태양의 안내자'라 말하며, 우주심의 본체와

합일되는 태양 문명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의 높은 영적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국내 최초의 글이 될 것이다.


카발라는 서양의 정신세계에 큰 바탕을 이루고 있는 비교(秘敎) 체계이다. 우리나라에 카발라가 명상가나 구도자들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이다. 그전까지는 '카발라'라는 명칭조차 무척 낯설고 생경한 것이었다. 식자층에서조차 막연히 '유대교 신비주의'라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체계의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두세 권의 카발라 관련 책들이 나오긴 했지만 지금도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아진다.


카발라가 세상에 표면적으로 나타나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시대부터이다. 특히나 16세기에는 '사페드'(북부 팔레스타인 지방)를 중심으로 전대미문의 카발라 흥성기를 이루게 된다. 당시에 많은 카발리스트들이 사페드에서 활동했는데 그 중 모세 코르도베로(라마크)와 이삭 루리아(아리)가 가장 위대한 카발라 스승으로 꼽힌다. 밀전(密傳)의 특성이 매우 강하여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현대에도 엄연히 카발라의 스승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스승으로 도릴과 아이반호프가 있다. 도릴(Doreal)은 8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에 소리 없이 카발라의 바람을 일으킨 스승으로, 구도자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그에 비해 아이반호프는 우리나라에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스승이다. 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통해 그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의 정신세계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영적 체험을 통해 빛과 희생의 길 선택


옴람 미카엘 아이반호프(Omraam Mikhael Aivanhov 1900∼1986)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현대의 영적 스승이다. 그는 1900년 불가리아(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책 살 돈도 없어서 옆 친구의 책을 같이 보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그는 거의 암기력에만 의존해 공부했음에도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생계 유지를 위해 대장간, 재단소, 과자 공장, 물감 공장 등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굴절되거나 더럽혀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통해 지성과 의지력, 이타심 등의 선한 성품이 계발되어 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영적인 기질을 보였다. 15세도 되기 전부터 힌두 서적들을 탐독하며 집중, 명상, 호흡 등의 기술을 혼자서 익혀나갔다. 어떤 때는 과도한 단식과 호흡 수련으로 인해 한 달 이상 지독한 고열로 몸져눕기도 했다.


13, 14세 무렵에 그는 친구들을 상대로 자신의 영적 능력을 시험했다. 예를 들어 염력으로 상대의 행동을 마음먹은 대로 조종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때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엄청난 영능(靈能)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날 밤 놀라운 환영을 보았다. 그의 앞에 두 형체가 나타났다. 하나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차갑고 감정이 없는, 그러나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그 존재는 아주 잔인하고 파괴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의와 관용과 사랑을 방사하고 있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는 자신이 빛과 어둠의 기로에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때의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빛과 이타와 희생의 길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신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16세 때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준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어느 봄날 아침 교외의 한 과수원에서 작은 책에 나온 호흡법을 읽고 몇 시간 동안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천상의 불을 삼킨 듯한 기분이 들더니 황홀경에 빠져 다른 고차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만물이 빛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빛은 신성한 불꽃 속에 있는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투사되어 나왔다는 것, 그리고 만물이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주의식과 합일되는 이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의 체험은 그의 내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혼의 불을 당겼다.


마스터 되노프와의 만남, 깨달음의 꽃


준비된 자에게 스승이 나타난다는 격언을 입증이라도 하듯 불과 열일곱의 나이에 그는 마침내 마스터를 만나게 된다. 그의 스승은 페테르 되노프(Peter Deunov)였다. 되노프는 1901년 유니버설 화이트 브라더후드(Universal White Brother-hood)라는 단체를 창설하여 1944년 입멸할 때까지 이끌었던 대스승이다. 당시 그를 따르던 제자는 4만 명이 넘었다. 1980년, 그러니까 공산주의 통치 40년이 지난 뒤에도 불가리아 인구의 10% 이상이 기본적으로 되노비스트(되노프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라는 통계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의 정신사에 그가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화이트 브라더후드, 즉 '백색형제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대로부터 은밀히 지구의 진화를 돌보고 있는 초월적인 성자들의 비교(秘敎) 그룹인 '대백색형제단'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성 운동이 거기에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봉사와 희생과 사랑으로 충만한 어린 제자의 성품을 꿰뚫어 본 마스터 되노프는 아이반호프를 자신의 품속에 거두어 보호하고 영적인 가르침을 베풀어주었다. 아이반호프는 기도와 명상을 위해 종종 산 속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스승은 그에게 영적인 공부뿐만 아니라 대학 수준의 지식도 아울러 갖출 것을 요구했다. 그는 여러 대학에 등록하여 일반 학문을 익혀나갔다. 그의 목적은 졸업장이 아니라 지적인 탁마에 있었기 때문에 한 분야에 대한 습득이 끝나는 즉시 다른 분야로 옮겨 나갔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자신이 펼치고 있는 운동이 자국 내에서 제동에 걸리리라는 사실을 미리 내다본 되노프는 가르침의 맥을 잇기 위해 아이반호프에게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을 준다. 비전(秘傳)에 따르는 끔찍한 테스트들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아이반호프는 마침내 스승의 명에 따라 1937년 프랑스로 건너오게 된다.


아이반호프는 1938년 1월부터 파리에서 공개 강연을 시작하였고 그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세브레에 최초의 공동체가 형성되게 된다. 그 이후 프랑스는 물론 유럽, 북미, 중남미, 아프리카, 동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명상 센터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47년 그는 종교적인 노선을 달리하는 적대자들의 모함, 그들과 연계한 권력자들의 전횡으로 2년 동안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불가리아 국적을 갖고 있던 그에게 스파이 혐의가 씌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962년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기에 이르렀고 이전의 모든 권리들(국적을 제외하고)이 복권되었다. 그 이후에도 그는 항상 배타적인 사상을 가진 종교권의 표적이 되어 언론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아이반호프는 세계 여러나라들을 여행하며 몇 달씩 머물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페드의 카발리스트, 일본의 선승(禪僧), 인도의 요기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1959년 인도에서 1년 동안 체류할 때 그는 많은 아쉬람들을 방문했는데 가는 곳마다 영적인 스승으로 환영받았다. 라마나 마하리시 아쉬람에 들렀을 때는 마하리시의 제자들이 타계한 구루의 방을 숙소로 내줄 정도로 그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그리고 기적의 성자, 님 카롤리 바바는 한 제자를 보내 아이반호프를 자기 아쉬람에 초대하여 며칠 동안 함께 보내기도 했으며, 성모의 화신이라 불리는 아난다모이마와 기쁜 만남을 갖기도 했다. 이밖에 티벳 교의에 대한 다양한 저작들을 쓴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 묵타난다의 스승 니트야난다 등을 만났다. 1982년 다시 인도에 갔을 때 캘커타의 아쉬람에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마드라시 바바는 그를 '태양 리시(rishi)'라 부르며 자신이 이제까지 만난 스승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존경하였다.


우주 창조의 신비를 푸는 열쇠 '세피로트'


아이반호프의 가르침의 핵심은 한마디로 카발라에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의 여러 종교들은 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나 제의, 계율 등 수많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가 신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원한다면 어떤 신비적인 감정을 체험하거나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밖에도 우리에게는 우주에 대한 심오하고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체계를 찾기 위해 인류의 모든 위대한 종교적 가르침들을 탐구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최상의 가장 완벽한 체계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카발라이다. 카발라의 생명나무(또는 세피로트 나무)는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체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정확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여타의 교의들이 잘못되었다든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시하는 개념들은 단편적이다. 그것들은 카발라만큼 심오하지 않으며 전체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을 제시해주지도 못한다. 이 심벌(생명나무)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의 현자들은 명상과 내적인 생명을 통해 우주적 실재를 이해하고 그것을 이 상징적 도상으로 전하였다. 세피로트나무는 진실로 우주에 대한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창조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생명나무는 모든 비전가들의 가르침, 전체 비전학을 구체적인 형상 속에 담고 있는 심벌이다. 그것에는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데 사용한 모든 원리, 원소,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 역시 생명나무의 이미지에 따라 창조되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아의 성찰이 오직 생명나무를 앎으로써만 가능한 이유이다.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은 자기 내적 존재의 광대한 차원들을 아는 것, 즉 생명나무의 모든 영역들과 그것들을 묶고 있는 고리들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급 자아와 합일되는 태양 문명 예언


그러나 그는 카발라가 매우 신성할 뿐만 아니라 무척 어렵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깊이 탐구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이런 면 때문에 준비 단계로 그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는 것이 태양 요가이다. 그는 태양 속에 우리의 고급 자아가 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수많은 영혼들이 태양과 합일되어(즉, 태양에 도달해) 있고 우리 또한 그것이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태양을 향한 안내자, 표지판이라고 말하고 있다. 태양 요가의 핵심은 태양과의 의식적 교감이다. 그는 태양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고 있으며, 명상을 통해 그것과 교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 기술적인 측면으로서만이 아니라 문화적, 영적인 차원에서도 전체 인류 앞에 태양 문명이 도래하리라 예언하고 있다.


출처: 봄바람하늘 - 스파니아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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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과 결핵환자 사랑하다 75세 총각 된
김준호
맨발로 밥을 빌어먹으면서 걸인들의 친구가 되고 폐결핵에 걸려서도 폐결핵 환자들을 돌보는 김준호씨는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의 수제자다. 
그가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나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까지 걸어온 삶은 쾌락과 안락과 좋은 음식과 화려한 의복만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기석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닌다더라’ ‘농사 지으며 길쌈을 하는 등 먹거리와 입을 것을 자급자족한다더라’ ‘평생을 채식하면서 독신으로 살고 쥐나 이도 죽이지 않는다더라’ ‘병들어도 약을 쓰지 않는다더라.’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지난 11월10일 풍문으로만 듣던 ‘기이한 삶’의 주인공을 만난 곳은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100년은 넘어보이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잎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우뚝 서 있는 귀일원의 작은 방에는 고승처럼 생긴 한 노인과 청년처럼 혈색이 좋은 또 다른 노인이 큰절을 하며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맞아들였다.

고승처럼 생긴 노인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닌 오북환 장로(吳北煥·92)였고, 혈색이 좋은 노인은 김준호 선생(金俊鎬·75)이었다. 이 두 노인의 현직을 구태여 따지자면 오장로는 귀일원의 이사장이고 김선생은 귀일원의 이사다. 귀일원은 정신질환자들과 지체인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이 가족처럼 모여사는 공동체다. 지난해 최우수 정신요양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 두 노인은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자선사업가들인가? 귀일원이 생긴 독특한 내력을 살펴보면 두 노인이 단순한 의미의 자선사업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엄두섭 목사가 쓴 ‘맨발의 성자(聖者)’란 책에는 거지와 병자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숨진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이현필이라는 사람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현필씨는 직후에 동광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곳에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수도자들과 이들이 돌보는 과부, 노인, 고아, 걸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사회복지 분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는데 동광원이 이런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동광원이 바로 귀일원의 전신이다. 지금도 종교계에서는 귀일원보다 동광원으로 불린다.

64년에 타계한 이현필씨의 제자는 전국에 50명 정도 되는데 경기도 벽제, 전북 전주·남원·장수, 광주광역시, 전남 화순·함평·진도·비금도·보길도 등지에서 순결 청빈 순명 정신에 입각해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구도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환자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독신으로 살며 살생을 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약 대신 자연적으로 치유하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50대 이상인데 오북환 장로는 이현필씨의 친구이자 제자이며, 김준호씨는 이현필씨가 가장 아끼던 수제자다. 동광원 공동체의 족보를 따지자면 이현필-김준호로 이어지는 셈이다.

김준호씨가 스승인 이현필씨의 인품에 마음 깊이 사로잡힌 것은 23세 때였다. 전남 해남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던 중 밤에 종소리를 듣고 마음이 끌려 찾아간 곳이 수동교회였는데 이곳에서 이현필씨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이현필 선생님과 오북환 장로님이 추운 겨울 새벽에 오셨는데 머리를 깎고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바지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양말도 신지 않았더군요. 종교인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마치 머슴 같았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강대 위에 오르지 않고 마룻바닥에 앉아서 설교를 하시는데 꽃병에 든 국화꽃을 보고 선생님은 몹시 떨리고 슬픈 목소리로 ‘꽃은 핀 자리에 그대로 둔 채 봐야 합니다. 앞으로 꽃을 꺾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의사가 되려는 공부를 포기하고 일생을 이분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준호씨는 이현필씨를 만나러 무작정 광주에 갔지만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이현필씨를 만날 수 없었다. 김씨는 광주에서 거지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중 광주 YMCA에서 이현필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준호씨는 그때부터 이현필씨의 문하생이 됐다. 입문식은 밥을 빌어 오는 일이었다.

“6·25전쟁이 나기 전이었을 겁니다. 비가 장대처럼 죽죽 내리는 날 아침이었는데 선생님은 저보고 밥을 빌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맨발로 근처에서 잘사는 듯이 보이는 부잣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앞에 서서 큰소리로 ‘밥 좀 주세요’라고 외쳤어요. 한참 뒤에 새댁이 나와 밥을 주기에 빈손을 벌였더니 놋그릇째 가져가라고 해요.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새댁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 밥을 들고 선생님께 돌아왔더니 선생님은 맨발로 나와 저를 맞으며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이 밥은 제가 먼저 먹겠습니다’라고 말해요. 그때 선생님이 밥 먹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습니다.”

 

‘다리밑의 물고기를 건져라’

  이현필씨는 김준호씨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걸인 한 명을 스승처럼 붙여줘 같이 다니게 했다. 탁발생활을 몸에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경도 정신이 살아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정신이 죽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제자에게 말보다 실천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이현필씨와 김준호씨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어보면 마치 옛 선승들이 선문답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김준호씨가 광주 시내의 다리 밑에서 10여년간 거지들과 함께 생활한 것도 이현필씨가 던진 한마디 말에서 비롯됐다.

“동광원의 단조로운 공동체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작정 나가버린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겨울이 닥치자 이현필 선생님은 그 아이들이 걱정이 됐는지 ‘상류를 빠져나간 물고기는 하류의 다리 밑에서 건질 수 있을 터인데…’라며 독백하듯이 말씀해요. 저는 그 순간 다리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부랑아들과 함께 살라는 말로 들었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 동광원을 나와 광주 시내 다리 밑에서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걸인들과 함께 동냥도 하고 이들이 병에 걸리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던 김준호씨는, 마치 가톨릭의 데미안 성인이 나환자들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려 죽게 된 것처럼 폐결핵에 걸렸다. 이현필씨는 김준호씨를 동광원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스승은 제자를 직접 간호했지만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쓰지 않는 데다가 영양가 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니까 병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약을 복용하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동광원 공동체가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었다.

제 몸도 돌보지 않고 순회강연을 다니고 틈나는 대로 제자를 간병하던 이현필씨도 마침내 후두결핵염에 걸렸다. 서울의 아현동 굴다리 밑에서 사는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를 희망해 서울에 올라온 이현필씨는 어느날 김준호씨를 서울로 불렀다.

“아현동 굴다리 밑 걸인을 시켜서 굴비를 사오게 하더니 물에 넣어 끓이게 해요. 그리고 그 국물을 당신의 입속에 넣게 하셨어요. 제자 앞에서 파계를 선언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고기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병으로 아픈 제자에게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스스로 파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광주에 있는 제중병원에 입원시켜달라고 하셨어요. 제가 모시고 갔더니 저도 함께 입원을 시키더군요. 그리고 한달 뒤 선생님은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가 다시 육식을 금하고 수도생활과 강연활동을 하시다가 6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무등산의 폐병환자들과 살다

  병원에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김준호씨는 광주 무등산에서 움막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퇴원한 폐결핵 환자들은 이승의 마지막 쉼터로 무등산을 찾았다. 김준호씨는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임종을 지켜봤다.

“움막은 계곡물이 흐르는 근처에 여러개 지었어요. 이들이 마지막 소원인 물을 실컷 먹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전염이 된다면서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극진히 돌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신선한 물을 마시다 보니 병이 완쾌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무등산에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러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무등산에 있는 움막은 무등원이라는 환자들의 공동체로 변했습니다.”

김준호씨는 정부가 폐결핵 환자 요양소를 세우기까지 20년간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동광원 공동체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며 보냈다. 지금은 전북 장수에서 수도생활에 전념하며 가끔씩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구도자들을 만나러 나온다.

스스로 새처럼 산다는 김준호씨는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스승인 이현필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김준호씨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현필씨의 삶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그라고 입을 모은다.

신의 말씀에 따라 자연과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시절에 적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채 독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이냐’ ‘자식이나 손주가 없어 노년에 쓸쓸하지 않으냐’는 우문에 김준호씨는 허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돈은 한푼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나와 생활했던 공동체 식구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고 손주들입니다.”


출처: 신동아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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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성경 넘나드는 道人목사 
김흥호
목사이기 이전에 도인이자 철학자. 35세때 주역을 묵상하다 문득 견성한 동양적 기독교인. 
하루 한끼, 새벽 찬 목욕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해 온 노스승의 悟道頌(오도송).
 
김홍근 <문학박사, 성천문화재단 연구실장> 
 
 

  김흥호(金興浩·81) 교수는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전해온 사람이다.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 귀를 뚫었고(聲聞), 각고의 노력으로 눈을 뚫었으며(緣覺), 자기를 이김으로써 코를 뚫고(菩薩), 평생을 대학강단과 고전연구 모임에서 강의하며 입을 뚫었다(佛陀).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했다는 말은 그가 곧 ‘본(視)’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 그는 견성(見性)을 했기에 관(觀)을 갖게 된 눈 밝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의 본질은 ‘나를 보고 나를 아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는 자신을 보았기에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기를 이기는 힘이며, 외적으로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힘이다. 불교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을 법보시(法布施)라고 하지만, 김교수도 평생을 강의하는 데 바쳤다. 한국 정신계의 선지식(善知識)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지붕 끝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땡그랑땡그랑 울리는 풍경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渾身似球掛虛空 혼신을 다해 허공에 매달려
一等爲他談般若 오로지 이웃을 위해 말씀을 전하네
東風西風南北風 동에서, 서에서, 남북에서 불어올 때마다
滴了滴了滴滴了 딸랑 딸랑 딸딸랑 (여정의 풍영시, 한글 번역은 필자)

그리고 그 고요한 풍경 소리의 여운은 잎이 다 떨어져(樹凋葉落) 발가벗고 서서 늦가을 바람에 알몸을 드러낸 채(體露金風), 시리도록 푸른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가지 위에 매달려 있는 빨간 홍시로 연결된다. 언젠가 젊었을 때 그가 쓴 아래의 글은 이제 팔순 고개를 넘은 그에게 그대로 자화상(自畵像) 같아 보인다.

지붕 위에 감이 새빨갛다. 다 익은 것이다(盡性). 동양 사람들은 다 익은 사람을 인(仁)이라고 한다. 자기 속알(德)을 가진 사람이요, 지붕 위에 높이 달려 있는 감처럼 하늘 나라를 가진 사람이다. 사랑의 단물이 가득 차고 지혜의 햇빛이 반짝이는 높은 가지의 감알, 그것이 어진 사람이다. 완성되어 있는 사람, 성숙해 익은 사람, 된 사람, 다한 사람, 개성을 가진 사람, 있는 곳이 그대로 참인 사람(立處皆眞), 언제나 한가롭고(心無事) 어떤 일에도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事無心), 동양에서는 이런 사람을 사람이라고 한다. 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平常心), 더 준비할 것이 없는 사람(無爲), 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命) 말이 쏟아져 나오고(道)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인이라고 한다. 인은 된 사람이다. (‘생각없는 생각’, 김흥호, 솔刊, p.16)

어질 ‘인(仁)’은 ‘씨’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 알의 감에 성숙한 인격의 이미지를 투영시킨 이 글은 목사인 그가 가슴속에 담고 있는 예수를 그린 것이다. 높은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달린 그 감은 자신을 인간의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그러나 “김흥호 교수의 글은 그 글이 그대로 그 사람임을 나는 믿습니다”고 평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의 말처럼, 수십 년 간 여러 후학에게 말씀의 성찬을 베풀어온 그도 이제 붉고 동그란 단감이 되어 뭇사람의 먹이가 되고 있다.

김흥호의 사람됨을 깊게 이해한 네 사람이 있다.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지기(知己) 안병무와 변선환, 그리고 일본인 선승(禪僧) 마쓰나가다.

먼저 다석은 김흥호의 생명의 은인이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다석 선생은 병상에 누운 청년 김흥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고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계시’라는 뜻의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는 다석이 내려준 것이다. 여러 차례 공동묘지 입구까지 실려갔던 김흥호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지금까지 45년간 병치레를 해본 일이 없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인 안병무와 변선환은 김흥호의 득음(得音)을 알아차린 친구들이다. 평양고보 동창인 안병무는 김흥호가 나이 40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미 깨쳤는데 뭘 고생스럽게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떠나는 친구에게 안병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의 죄인은 목사이니 제발 목사가 되어서 돌아오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흥호는 미국에서 감리교 목사가 되어 돌아온다.

 

“自性을 보았는가?”

  김흥호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던 1950년대 후반부터 같은 학교의 이효재, 이남덕 교수 등과 동양고전 독서회를 조직하여 공부하면서 학생들에게 철학 특강을 했는데, 교목(校牧)이 된 후 강의원고를 풀어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으로 1970년부터 12년간 개인월간지 ‘사색’을 발행한다. 그 잡지의 권두언을 읽던 변선환은 그 글이 ‘김흥호라는 한 한국인의 마음에 비친 그리스도 실존의 모습’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선불교를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쓰의 제자로 미국 시카고 선(Zen)센터 소장으로 있던 마쓰나가는 1970년대 초에 한국의 선사들을 만나보려고 내한했다. 그는 자신을 안내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다,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버틀러대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을 공부하여 일어와 영어가 능통한 김흥호를 소개받았다. 전국의 각 사찰을 일주하며 고승들을 만나보고 서울로 돌아온 마쓰나가는 한국을 떠나기 전 동국대에서 한국의 식자들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데 청중석에서 선문답식의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그 동안 전국 각지를 함께 다니며 숱한 대화를 나누면서 김흥호의 깨달음의 경지를 잘 알게 된 그는 김흥호에게 대신 대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즉석에서 입을 연 김흥호의 거침없는 법담은 좌중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마쓰나가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신문에 한국의 선불교 순례 경험을 기고했다. 그 글에서 그는 한국에 가보니 뜻밖에도 기독교 목사인 김흥호가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소요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적었다.

그 기사는 한국 불교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수좌가 김흥호를 찾아왔다. 김흥호를 점검할 요량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자성(自性)을 보았소?”

김흥호는 대답했다.

“그렇소. 보았지요.”

놀란 승려가 되물었다.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김흥호가 대답했다.

“석가모니는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말문이 막힌 그 승려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돌아가서 어느 불교지에다 김흥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흥호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회 강단 선 14살 평양 고보생

  1919년 황해도 서흥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김흥호는 철이 들면서부터 ‘나는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화두를 품었다. 평양고보에 다니다 방학이 되어 본가가 있던 고향 대동강 두로도(豆老島)에 돌아오면 마을 교회에서는 14살에 불과한 그를 평양고보생 인텔리라 하여 설교를 시켰다. 독립지도자로 활동하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김흥호가 10살 때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해 당신이 세운 교회의 강단에 섰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대중에게 설교를 하는 진땀나는 경험을 한 김흥호는 그 뒤 틈날 때마다 당시 평양과 서울의 교회에 다니면서 유명 목사들의 설교를 기록하였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가 강단에 서기 위해서였다. 이후 평양 남사현 교회에서 이윤영, 이완식, 홍기주, 홍기횡, 최근필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 ‘나가자!’를 듣고 깊이 감동받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남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그는 내심 무척 괴로워한다. ‘진정한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흥호의 기독교 신앙은 변증법적으로 세 차례의 굴곡을 겪는다. 먼저 10대 후반에는 당시 식민지 체제하에서 의기소침해진 한국인들을 고무하기 위해 크게 유행하던 부흥회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 후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다니면서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 강의를 듣고 신앙적으로 새로 눈뜨게 된다. 그는 무교회주의자 선생들의 전집을 탐독하면서 기존 부흥회식 기독교, 즉 ‘유(有)교회적 입장’에서 양심에 따른 지성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무(無)교회적 입장’으로 옮긴다. 이 입장은 후에 다석 유영모를 만나면서 유와 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가온(中)교회적 입장’으로 승화된다. 그는 다석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어릴 때부터 품어온 문제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를 풀게 된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7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다. 생면부지의 서울에서 갖은 고생을 하던 그는 정인보 선생을 찾아가 선생의 소개로 국학대학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강연을 한 후 철학개론 교수로 채용된다. 당시 나이 많은 학생 중에는 ‘주역’을 줄줄 외는 사람도 있고 해서 동양철학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먼저 정인보 선생에게서 양명학을 배운 뒤, 이광수를 찾아간다. 춘원은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고당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온 유영모를 알게 되었는데, 그를 ‘시계 같은 분’으로 부르며 외경하고 있었다(당시 함석헌은 4학년생이었다). 춘원은 김흥호에게 다석을 추천했고, 정인보 선생도 다석에게 찾아가라고 권했다.

1948년 봄 김흥호는 처음으로 유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첫날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후에 이 삼재(三才)사상은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에 핵심을 이룬다.) 김흥호는 다석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씀엔 인격의 무게가 실려 가슴으로 바로바로 육박해 들어왔다. 다름아닌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힘이었다. 김흥호가 본 다석은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정좌를 하고, 평생 걸어만 다녔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참사람(眞人)이었다. 다석(多夕)이란 호에는 하루 세 끼를 저녁에 합쳐 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겨울 아침, 바다에 뛰어들다

  김흥호가 파악한 다석의 실천(道)은 ‘一坐 一仁 一食 一言’의 ‘하루살이’이다. 즉 새벽에는 일어나 꿇어앉아 공부하고,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저녁에는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며, 밤에는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침은 ‘봄’이요 따라서 꿇어앉아 동서의 고전을 ‘보며’, 낮은 ‘여름’이요 따라서 열심히 ‘열음질(농사)’을 하고, 저녁은 ‘가을’이요 따라서 겸허하게 ‘갈무리(추수, 즉 식사)’를 하고, 밤은 ‘겨울’이요 따라서 깊은 잠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다석은 하루를 곧 일생처럼 살았다. 밤마다 십자가에 달리고, 아침마다 부활했다. 그는 그의 정신일기(多夕日誌)에 하루하루를 셈하여 기록하였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언제나 ‘오!(감탄사) 늘(영원)’이었다.

김흥호는 스승이 실천해 보인 그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걸어갔다. 심지어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는 스승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지지 않기 위해, 제자는 피란지 부산과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겨울에 아침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 특별한 사제관계였다.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도인(道人)의 삶이라면, 김흥호의 삶은 바로 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김흥호는 훗날 다석의 도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한 후 이렇게 요약하였다.

一食晝夜通 一言生死通
一坐天地通 一仁有無通

김흥호는 다석을 따라 다닌 지 3년 만인 어느 날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한 다석의 설명을 듣고 귀가 뚫리는 경험을 한다. 그 후 다석은 본인이 67세 되는 날 세상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김흥호는 그 다음날 스승의 장례를 치르려고 댁으로 찾아가던 도중에 길에서 다석을 만났다. 그 순간 김흥호는 세상을 떠난 것은 다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심신이 지극히 쇠진해 있던 김흥호는 어머님의 간절한 권유로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석은 한사코 제자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너무나 병약하던 김흥호는 오로지 쉬고 싶어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다. 이때 그는 신촌에 있던 천막교회를 인수받아 대신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결혼을 했어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주역’에 몰두했다. 매일 한 괘씩 종이 위에 그려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35살 되던 해 3월17일 오전 깨달음을 얻는다. 평소 다석은 한국인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구약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동양의 유불선(儒佛仙) 삼교와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의 근본 오의(奧義)를 회통한 후 그 견처(見處)를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으로 남겼다.

斷斷無爲自然聲 자신을 텅 비웠을 때 자연과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卽心如龜兎成佛 마음의 본체를 깨치면 만물이 부처다
三位復活靈一體 부활한 정신에 성부 성자 성신이 하나의 영으로 빛난다
天圓地方中庸仁 하늘과 땅의 진리는 인간에게서 구현된다 (한글 번역은 필자)

김흥호도 이날부터 일식(一食)에 들어갔다. 그리고 석 달 뒤 ‘대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스승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중용’을 우리말로 옮겨 스승에게 보였다. 그때 마침 다석의 집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이정호 전 대전대 총장이 찾아와 있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이정호 교수에게 자신이 번역한 ‘대학’을 보이며 “이 글은 공자께서 번역하셔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김흥호를 향해 “이것은 김군이 쓰기는 하였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김흥호는 연세대, 이화여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면서 유, 불, 선, 기독교의 주요 경전을 3년간씩 총 12년 동안 읽어나갔다. 1963년 44세 되던 해, 미국으로 교환교수 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동 대학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는 한편 웨슬리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전 미국 감리교단의 비숍(감독)이며 한국 감리교 명예감독이었던 레인즈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인디애나주 감리교회의 정목사로 등록된다.

1970년대에는 난곡 김응섭 선생에게서 서예를 배웠으며 1984년 65세로 이화여대에서 정년 퇴직을 한다. 그해 영국으로 가서 재영국 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귀국,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지금까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1996년 이화여대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2시간 동안 동양고전과 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법화경과 신약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첫 시간에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둘째 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성경 내용이 동양적 정서로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그 동안 강의해온 동양고전은 왕양명의 ‘전습록’ ‘주역’ ‘다석일지’ ‘도덕경’ 등으로 제자들이 구술한 것으로 솔출판사에서 전 30권 분량의 ‘김흥호 전집’으로 발간중이다(현재 6권 발간). ‘견성(見性)한 목사’ 김흥호가 남긴 말은 21세기의 본격적인 종교 교류시대에 지침이 될 것이다.


출처: 신동아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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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파괴하는 말총머리 한의사
김홍경
‘기존 권위는 무시당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김홍경. 사람들은 이런 그를 재야 한의학자, 언더그라운드 강사, 청개구리, 돌팔이 한의사 등으로 부른다. 도올이 잠든 노자를 흔들어 깨웠다면 금오는 앉은뱅이로 굳어 있던 사암을 일으켜 세우는 중이다. 10월30일부터 EBS 방송특강 ‘김홍경이 말하는 동양의학’을 통해 다시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금오(金烏) 김홍경(50). 매주 토요일 있는 방송 녹화시간은 200여 방청석을 가득 메운다.
 
곽대중 <자유기고가>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희끗희끗한 꽁지머리, 다듬지 않은 턱수염, 늘 털털한 생활한복 차림. 왜 머리를 기르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냥 좀 특이해 보이려구요. 아마 세상 사람들이 다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면 그때 전 빡빡 밀고 다닐 걸요” 하면서 호쾌하게 웃는다. 금오는 외모만큼이나 살아온 과정도 독특하다.

일본 오사카 근처에서 광병(狂病) 치료로 이름이 높았던 조부, 명문대학을 나온 부모 슬하에서 그 역시 청소년기에 이른바 ‘서울대병’을 앓아야 했던 사람이다. 서울대 의대를 두 번 떨어지고 꿩 대신 닭으로 선택한 것이 경희대 한의학과.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의학에 대한 주위의 멸시와 천대가 심해 좌절하다, 수석으로 입학한 대학을 꼴찌 문턱에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한의원을 개원하여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돈도 벌었으나 술과 노름에 빠져 약혼녀마저 달아나버리고, 몇 번이나 자살할 생각까지 하였다는 그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방황의 연속이었다.

“돈이 없으니 월급쟁이 생활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마산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던 어느 날, 꿈속에 조부님이 나타나더군요. 발가벗고 요가 자세를 취한 채 붉은 만장을 든 모습이었는데, 그 만장에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사암침법’을 터득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전국을 떠돌며 ‘스승’을 찾아 다녔다. 사암침법은 동의보감의 허준, 사상의학의 이제마와 함께 조선의 3대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사암(舍岩)도인의 전설적인 침법. 그러나 그 해설서라 할 수 있는 ‘침구요결’은 처방이나 응용법은 없이 온통 난해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 한의과 수업시간에도 그저 몇 분만 설명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금오는 주역과 선(禪)을 배우러 다니는 데 주력하였다.

좋은 스승이 있다면 천릿길을 마다않고 달려가 만났던 재야의 스승 중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주역학자 아산 선생과 85년 102세로 입적한 수덕사 방장 혜암 스님. 금오는 이 두 사람을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산 선생에게는 주역을 배웠습니다. 정통으로 입문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거기서 가설, 힌트를 얻어 나왔습니다.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혜암 스님의 선문답(禪問答). 선문답을 탁마하면서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선문답은 알 듯 말 듯 아리송하지만 의외로 답은 대단히 단순합니다. 사람들이 선문답은 골치 아프다고 하는데 답이 너무 코앞에 있어서 못 푸는 겁니다.”

난해했던 ‘침구요결’의 구절들을 하나하나의 원리로 깨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하고 도식화된 이론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게 되니 ‘마음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400년간 주저앉아 있던 사암침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암기 침법이 아닌 원리 침법

  겉으로 볼 때 사암침법은 사용하는 침이 약간 더 굵고, 손과 발에만 시술하는 것, 그리고 약간 비스듬하게 침을 꽂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침법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가느다란 대롱침은 한의학 용어로 이야기하면 보사(補瀉)가 불가능합니다. 보사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사침법(斜針法)으로 경락의 흐름에 따라 시술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모든 침술경전에는 보사를 행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쓰이는 모든 침법은 보사를 무시한 일종의 체침법(온몸에 침을 꽂는 침법)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을 쓰면 어디에 좋다, 어디가 아프면 어디에 침을 놓아라. 이건 완전히 암기식 침법이죠. 진정한 침법은 원리(原理) 침법이 되어야 합니다.”

사암침술의 원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갈 즈음 방랑생활을 정리하고 대학 강단에 서보기도 했고, 종로에 있는 큰 건재 약방의 관리의사, 종로구 한의사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자신의 침술을 알리고 싶은 생각에 친구에게 부탁하여 채용된 곳은 동국대 한의과 대학 외래 임상강사. 그러나 원리에 대한 가르침은 없이 암기만 강요하는 한의학 교육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성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1983년 한 해 만에 물러나야 했다. 약방 직원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방된 약재의 양보다 줄여서 조제하거나 무면허 의사가 진료하는 것을 보다못해 보건소에 고발하는 등 타고난 반골기질로 인해 스무 군데를 옮겨 다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1984년 12월. 1년 동안 그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사암침법을 알고 싶다고 찾아왔다. 열 평 남짓한 약방에 스무 명을 모아놓고 ‘사암도인 침술전수 40일 강좌’라는 이름의 과외수업을 시작하였다. 수가 늘어나 폐교를 빌려 사용하기도 하면서 이어진 것이 현재까지 22차에 걸쳐 30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고 ‘사암 한방의료봉사단’의 요람이 되었다. 지금도 방학 때면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든다. 이제 금오의 40일 강좌는 한의대 학생들의 ‘학점 없는 필수과목’이 되었다고도 한다. 처음엔 한의대 학생들만 수강하다가 이젠 개업 한의사들이나 공대, 법대 출신 등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들도 찾아오고 있다.

합숙훈련 방식으로 진행되는 40일 강좌는 그 수업방식부터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정작 배우고 싶어하는 침술은 가르치지 않고 하루종일 논밭 일을 시키고 해가 저물 때 몇 시간씩 명상 시간을 갖게 한 다음, 밤이 깊어 시작되는 수업은 새벽녘에야 끝난다. 취침시간은 길어야 두세 시간뿐.

“일반인을 상대로 한 강의야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대학생들은 나중에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환자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혹독하게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칩니다. 가르치다 보면 애들이 너무 똑똑해서 탈이라는 걸 느껴요. 한의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지금까지 배워온 것, 고정관념, 이런 걸 다 무시하고 비워둬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면 자기 과거의 기억으로 자꾸 연상하려 들어요. 원리를 따르지 않고 제 지식을 따르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것을 부수는 데 가장 큰 힘을 쏟는 건데, 못 견디면 거의 쫓아내다시피 합니다. 100명 들어와서 열댓 명 남는 수준입니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재야 한의학자, 언더그라운드 강사, 청개구리, 돌팔이 한의사 등으로 부르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죄값은 받아야죠, 뭐. 대학원이나 박사코스 같은 정상적인 과정을 밟지 않았고, 또 그것을 제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약간은 좀 안티 유니버시티하게 대학가의 공부를 거부하고 재야학자들에게 배우러 떠다녔기 때문에 정규코스를 밟은 사람들한테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겁니다.”

 

이론은 배운 다음 잊어 버려라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사암 한방의료봉사단장이라고 불러주면 제일 영광이고, 한의사 김홍경이라고 불러주면 더 영광”이라고 대답하는 금오는, 그러나 한의사라기보다는 오늘도 사람들의 잘못된 건강상식과 사고습관을 질타하는 데 더욱 많은 힘을 쏟으며 돌아다니는 아방가르드에 가깝다. 벌써 10여권의 책을 냈고, 최근에는 밀려드는 강의 청탁을 ‘거절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이론보다는 직관을 강조하고 과거의 권위나 상식에 얽매이지 말라고 주장하는 그의 강의는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저는 이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론을 배운 다음 어느 날은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글을 열심히 써 숙필 단계에 이른 다음에는 다시 생필, 즉 어렸을 때 필법으로 돌아가라고 했거든요. 바둑으로 말하면 정석을 배운 다음에는 지금까지의 정석을 내던져야 응용이 가능한 거죠. 저는 한의학 강의를 쉽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순하다, 심하게는 저질스럽다고도 하는데, 저는 이건 몸에 좋으니 먹어라, 어디가 아플 때는 무엇을 어떻게 먹어라 하는 이런 암기식 한의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한의학을 만들자는 것이고, 제가 이렇게 쉽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기까지는 저 역시 수많은 언어와 이론을 넘어선 고충이 있었습니다.”

파격적인 주장으로 과거의 권위를 흔들면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기존 권위는 무시당해야 마땅하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학문의 시작은 의심 아니겠어요. 의심을 자주 하고 질문을 자주 하는 건 ‘지혜의 시작’입니다. 저는 강의중에도 약이면 독을 한번 생각하고 독이면 약을 한번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탄력성 있는 두뇌를 개발하자는 거죠. 그런데 지금까지의 한의학이나 양방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 있습니다. 정치적인 용어로는 절대주의죠. 저는 좀 상대주의적으로 사고하자, 의심을 가져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달변가다. 질문을 하면 주저없이 대답한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영화와 음악을 두루 예로 들면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금오의 강연을 듣다보면 저절로 흥이 난다. 그가 늘 강조하는 화두(話頭)는 ‘매사를 뒤집어 사고하라. 상식에 매이지 말고 원리에 눈떠라’. 그러나 정작 환자들 앞에서는 웃기고 울리며 진지하게 진료하는 그를 지켜보면 그가 단순히 기존 권위와 질서에 무작정 덤벼드는 돈키호테적 기인(奇人)만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상식파괴하는 말총머리 한의사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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