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최후

요한복음서의 수난기(요한 18, 1-19, 42)를 읽어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편141편을  읊은 뒤에 숨을 거두었다.



관련자료

<잔꽃송이>

<프란치스코> - 헤르만 헤세



참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 위키백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 나무위키

요한복음서 18장 - 굿뉴스

시편141편 -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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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타울러

Johannes Tauler (1294?-1361)

“빛나는 박사”

(그림자료출처: http://www.opkorea.org/도미니코회 홈페이지)

 

 

 

 

I. 중세 독일 신비주의와 요한 타울러

 

1. 중세 독일 신비주의의 태동

● 12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세속의 권력과 부를 탐닉하는데 대한 반발로 급진적인 ‘순수 교회’, ‘가난한 교회’ 운동이 일어났으며, 제도적 교회와 성사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신비체험을 강조하는 신앙형태가 번성하였다.

● 제도권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결국 제도권 교회 대신 개인이나 소그룹의 신앙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졌고, 초월자요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에서 내재(內在)하시는 하나님으로 신앙의 축이 옮겨지게 하였으며, 교리보다는 경험을, 이성보다는 직관을 중시하는 풍조를 낳았다.

● 1223년 교황 인노센트 3세는 번성하는 이단사조를 막고자 종교재판을 실시하고, 청빈을 강조하면서도 제도권 교회의 질서를 따르는 프란시스회(1210)와 도미니코회(1216)를 장려하였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는 도미니코회의 걸출한 신학자이며 설교가로서, 자생적 평신도 모임인 베긴회와 베가드회를 중심으로 퍼져 있던 중세 독일 신비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후일 이단성 시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재판진행 과정에서 사망한다.

● 에크하르트의 역할은 그의 뛰어난 두 제자, 하인리히 수소(Henry Suso; 1295-1366)와 요한 타울러(John Tauler; 1300?-1361)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친구들’ 이라는 모임의 영적 지도자들이다.

 

2. 요한 타울러의 영향력

● 타울러의 시대인 14세기는 정치 및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타울러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단하여 스승인 에크하르트를 만난 16세 즈음, 1315 -1317년은 이상기후로 인한 대기근이 발생하여 유럽 전체인구의 10%를 숨지게 하였다. 또한 타울러의 나이 50을 전후로 한 5년간인, 1347 - 1351년에는 유럽일대에 몰아닥친 흑사(Black Death)병으로 인해 유럽 전체인구의 약 30%에 해당하는 3,000만명(교황청 집계 4,300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죽음의 공포는 신의 재앙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지도력에 대한 회의와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합일 욕구가 신비주의 확산을 부추겼으며, 미신적 종파들조차 흥왕하게 되었다.

● '하나님의 친구들'(Friends of God)이라는 운동의 지도자였던 타울러는 후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영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인들이 외적 의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비난하고, 내적 생명력을 중시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내재(內在)', '내적 빛'과 같은 표현이 많이 있었다. 루터는 자신이 타울러의 저서라고 생각했던 ‘독일신학’(Theologia Germanica)을 세 차례나 편집하여 출판하였고, 그를 ‘독일교회의 아버지’라고 찬양하였다.

● 타울러의 설교들은 라인 강 유역과 저지대 국가들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었으나, 후에 인쇄되어 어디서나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설교집은 1498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1505년에 아우그스부르그에서 재판되었는데, 마틴 루터도 이것을 구입하여 읽었다. 이 설교집의 출판으로 타울러는 독일 종교계의 영성사에 특유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17-18세기에 있었던 영적 부흥이나 신비주의적 신학 논쟁에서 타울러의 설교들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

● 1548년에 카르투지오회의 수리우스(Laurentius Surius)가 타울러의 설교를 라틴어로 번역한 Pietas Tauleriana 를 펴내며 루터가 타울러에게 깊이 매료되었음을 밝혀, 타울러는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확보한다. 이후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지에서도 큰 환영을 받았다.

● 수리우스는 자신이 출판한 타울러 설교집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울러의 매력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는데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악을 근절하고, 내면의 중심에 주의를 기울이고, 덕을 사모하고, 무절제한 욕망과 자기 고집을 부인하라고 권면했다. 또 많은 장애물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겸손하고 신실하게 따름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마침내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한 영이 된다고 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마음과 혼과 정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16세기에 그의 강론들은 수난을 당한다. 1518년에 예수회에서는 타울러의 저서를 읽지 못하게 했고, 1590년에는 벨기에의 프란치스코회도 그의 저서를 읽지 못하게 했다. 교황 식스투스 6세는 스페인에서 그의 저서를 정죄하고 금서목록에 수록했다. 한편 17세기에는 정적주의(quietism)로 오해받는다. 그의 강론들은 19세기 이후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요한 타울러

● 타울러의 주요 관심사는 에크하르트적인 Pati Deum(이탈과 자기포기에 의한 하나님 체험)에 있으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사 이 세상에 하강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구체적인 형태를 띤다.

● 즉 외부적인 종교적 근행(勤行)이 아닌, 내면의 중심으로 향하라는 가르침은 에크하르트와 동일하지만, 에크하르트가 신의 근저(Gottesgrunt)와 신성(Gottheit)에로 환원하기 위한 돌파(초탈)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여 자칫 ‘자력구원’의 메시지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다고 한다면, 타울러는 자기부인과 이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십자가와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히 강조하고 이를 통해 삼위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 타울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지 않고 강조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模本)이 됨을 강조함으로써, 신비적 경험에 따른 감각적 엑스타시의 집착적 추구를 경계하였다.

● 타울러는 결코 성육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인 그리스도에게로 건너뛰지 않는다. 그는 분명하게 “누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를 지나쳐 넘어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박탈의 구체적 의지인 겸손과 자기인식을 특징으로 하는 하강운동을 강조하였다. 이런 까닭에 ‘낮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그만큼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는 의식이 성립된다.

●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철학적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면, 타울러는 성경말씀과 공식 인증된 성인들의 말씀을 주로 인용하였다.

 

II. 타울러의 생애

● 요한 타울러는 1300년경(1294?)에 학문과 상업 및 교역의 중심지인 도시 스트라스부르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방문한 1314년에 타울러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단하여 정식 수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쾰른의 ‘스투디움 제네랄레’로 파견되어 이동할 때, 타울러도 스승을 따라 쾰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타울러는 하인리히 수소 등의 친구들과 만나게 된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세상을 떠난 1327년에 타울러는 2년 동안 쾰른 대학의 외국인을 위한 강좌에서 신학을 가르치도록 파견되었다.

● 1329년에 타울러는 수도회 신학교수로 스트라스부르그에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도원 성당에서는 열심히 설교했다. 이 젊은 교수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몰두했고 신학의 가르침과 설교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 타울러는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일곱 개의 도미니코 수녀원(각 수녀원에는 100명 정도의 수녀들이 있었다)과 도합 200-300명의 여인들로 추정되는 베긴(Beguin)들의 작은 공동체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 1339년 스트라스부르그의 수도원은 정치적인 이유로 스위스 바젤시로 이사하였고, 타울러는 1339년부터 1343년까지 바젤시에 머문다. 그는 바젤시에서 ‘하나님의 친구들(Friends of God)’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증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 1343년에 장상들은 쾰른의 수도회 대(大)신학교 교수와 설교가로 타울러를 파견했다.

● 1346년에 공동체는 다시 스트라스부르그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도 함께 돌아왔다. 그곳에 돌아왔을 때 장상들은 대중들이 요청한 대로 그가 설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교수직책을 감면해주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와 쾰른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전 지역에서 유명해졌다.

● 1350년에 장상들은 타울러를 다시 한 번 쾰른의 수도원으로 파견했다. 그는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10년을 기도와 설교 및 영적지도에 정진했다.

● 1360년에 타울러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매우 병이 깊어졌다. 이 때문에 장상들은 그를 다시 한 번 그의 출신 수도원인 스트라스부르그 수도원으로 파견했고, 그곳에서 형제들은 그를 정성껏 돌보았다. 몇 달 후인 1361년 5월 17일에 타울러는 거룩하게 생을 마쳤다.

 

III. 타울러의 가르침

● 그는 종교에 있어서 외적인 의식을 존중하는 것을 지양(止揚)하고, 하나님은 오로지 마음에 내재하신다고 말하며, 내적 생명력을 강조했다. 그는 그 자신이 먼저 경건한 생활의 모범을 보였으며, 단순한 신앙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회개를 강조했다.

● 타울러의 신비주의의 핵심은 ‘하나님 본성의 직관’, 즉 ‘복된 관상’ 내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복된 지식’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는 이 가르침을 성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받아들였고, ‘신적 지식은 완전한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추구하여야 한다’고 함으로써 더욱 발전시켰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인간적이고, 죄스러운 행위가 중단될 때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탄생하실 수 있다. 이러한 탄생은 인간 본성을 훨씬 높게 들어 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으로 도움을 받는다.

● 우리가 ‘영의 적나라함(비움)’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을 부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체험하지도 못한다. 관상의 본질은 바로 영의 적나라함에 이르는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분을 아는 것은 창조물의 유비의 방법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출중함의 방법으로 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성이 모든 감각적이고 지성적인 영상들로부터 완전히 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관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 오직 영의 적나라함(비움)을 통하여 지성은 충분히 소극적이고 수용적이 되어 하나님과 친숙한 일치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세 단계로 살아간다. 감각적이고 지성적이며 보다 높은 단계인 정신의 단계에서 살아간다.

● 극기와 포기의 방법에 의해서 인간은 영혼의 중심인 깊은 곳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적극적인 수행을 통하여 보다 낮은 욕구들로부터 초탈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함을 전제로 한다.

● 영혼의 깊은 곳은 신비적 체험을 할 수 있는 영역이며 지성과 의지가 그것을 접할 수 없으므로 관상적 체험은 영혼의 자연적 기능들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 이것은 각자가 영혼의 중심인 ‘마음속 깊은 곳’(영혼의 근저)으로 귀환할 때 성취된다. 거기에 삼위일체께서 거하신다. 그러나 지성과 의지는 삼위일체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그 깊은 곳’(근저)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성령의 두 선물들인 이해와 지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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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의 인물입니다.


종남산 자오곡에서 수행했다고 합니다.

종리권에게 도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배운 사람들로 자혜와 최승우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자혜와 최승우는 신라로 귀국했지만, 김가기는 귀국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도법을 최치원에게 전수하고 갔다고 전합니다.



최치원과 만났다는 부분은 상당히 어색합니다. 

최치원의 생몰년대와 김가기의 생몰년대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지요.


무튼 약간 전설적으로 윤색된 점이 있는데, 

김가기 라는 인물 자체는 진실로 보입니다.

사적비까지 발견되었으니까요.



참고

김가기 - 위키백과

신라 김가기 사적비 중국서 발견 - 중앙일보

신선ㆍ도인 이야기 : -海東편- 김가기(?∼859) - 대순회보

통일신라시대의도교사상 - 위키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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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서 후궁의 다툼을 보고 세속의 환멸을 느껴

24세에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의 왕족.


당나라에서 출가하여 교각(喬覺)이라는 법명을 얻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후 3년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등신불 위치 : 중국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 


등신불은 육신보전이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구도 수행을 했던 암자에는 등신불이 아니라 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김교각스님은 구화산 지장보살로 추앙받았습니다.

평소에 백토소미를 먹었는데, 백토소미란 백토 + 쌀을 의미합니다.


수혜미라고 김교각 스님이 직접 남긴 시 한편이 전하고 있습니다.


酬惠米  - 金喬覺

 

란 納布依 浮海修身到華西 

原身乍是尊王子 慕道相逢吳用之 

來散구 門求他語 昨정 送米續農炊 

而今餐食黃精飯 腹飽忘思前日饑 


수혜미 - 김교각


「비단옷 포의로 갈아입고 바다건너 도를 구하려 구화산을 찾아왔다네. 

나는 본디 왕자였다오. 수행의 길에서 사모하는 오용지를 만났네. 

가르침을 주는 것만도 고맙거늘 이제는 이렇게 쌀까지 보내왔다네. 

반찬을 준비하고 좋은 쌀로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고나니 

지난날의 배고픔 모두 잊어 버렸네.」 


 

참고

김교각 - 위키백과

수혜미 - 조인스블로그

김교각스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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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6년~1886년)는 인도의 신비주의적 종교가이다. 

 캘커타 교외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사원(寺院)의 간부 승이 되어 칼리 여신을 숭배하였다. 너무 열심히 순수하게 숭배했기 때문에 때때로 기도에 열중할 때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가 있었는데 후에 숲 속에 들어가 12년 동안의 고행을 하여 신비적 체험을 쌓았다. 

 명상·고행을 중시하는 열렬한 비슈누파 교도였으나 이슬람교·기독교 등 각 종교에 대한 이해도 깊었으며 종교 진리는 결국 각 종교의 구별을 초월한 곳에 귀결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끝내 모든 세속적 생활을 이탈한 학문과 덕이 함께 높다고 하는 파라마한사의 존칭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에 통달한 것은 아니었으나 샹카라의 베단타 사상에 입각하여 합리주의의 지적 태도로서가 아니라 내발적(內發的)인 열정으로써 설법했기 때문에 많은 공명자를 얻기에 이르렀다.



라마 크리슈나는 인도의 3대 성자 중 한 사람이다.

(인도의 3대 성자는 붓다, 상카라, 라마크리슈나이다.)


그의 주요 수행 방식은 헌신이었다.

헌신. 기도. 명상.


그리고 하나의 종교를 넘어

다양한 종교에 대해 깊이 체험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참고

라마크리슈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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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 1260년경-1327년)는 독일의 로마 가톨릭 신비사상가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마이스터 엑카르트라고 통칭된다.



그리스도교이지만, 불교적인 그리스도교 같은 묘한 느낌이 있다.

허공의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비범한 인물이다.


에크하르트는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연결하는 지점에 

서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논하는 하느님의 개념은 불교의 공사상과 많이 닿아있다.


그가 외도인 것일까?


그렇게 보긴 어렵지 않을까.


세상을 깨우는 자의 소리와

세상에 어둠을 외치는 자의 소리는

다르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그리스도교를 배웠으며

좋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대표적인 제자로 

요하네스 타울러 Johannes Tauker 1300~61

하인리히 조이제 Heinrich Seuse 1300~65

가 있다.


참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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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베들레헴 출신이자, 나자렛 마을 사람-마리아와 요셉이 나자렛 출신-이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둘 다 간직하였고, 그렇기에 따를 수 있는 모범이 된다.

만일 예수님이 순수한 신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4복음서

4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

4복음서 중에 가장 신뢰할만한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라고 본다.

루카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를 참고하면서 그 내용을 편집하고 변경했다.

같은 이야기라도 마르코 복음서의 내용과 루카 복음서, 마태오 복음서가 조금씩 다르다.

마르코 복음서가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복음서인 만큼 진실성의 수준도 높다고 본다.


크리스마스

정확히 이 날짜가 예수님의 탄생일은 아니다. 로마에서 태양신을 기리는 축제가 12월 25일에 열렸는데, 태양신 신앙이 쇠퇴하고, 그리스도교가 힘을 받으면서 점차적으로 태양신이 축소되고 그리스도교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출생시기는 기원전 4년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에티오피아에서는 예수님에 실제 출생시기에 맞게 독자적인 달력을 쓴다고 한다.(즉 4년 느린 달력을 쓴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전통이 매우 강하며, 초기 기독교의 신앙형태와 전통적인 요소가 잘 혼합되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로 믿음을 가지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련지 모르겠다.


믿는자에게는 믿음의 표징이 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였다.

그리고 믿음을 끝없이 강조하셨다.




참고

나자렛예수-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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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비르(영어: Kabir, 힌두어: कबीर, 펀자브어: ਕਬੀਰ, 우루두어: کبير‎, 1440∼1518)는 인도의 철학자, 성자, 시인이다. 원래 비나레스 브라만 계급의 한 과부의 아들이었으나 길거리에 버려진 것을 이슬람 교도의 방직공 부부가 양육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비슈누파의 수행자(修行者) 라마난다를 사사(師事)한 뒤부터 유일절대신(唯一絶對神)인 라마(Rama), 즉 범(梵)에 대한 신애(信愛)를 통한 해탈을 주장하였다. 그 설은 힌두교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이슬람 교도에 대해서까지 똑같은 해탈을 주장하여 이슬람교·힌두교의 차이를 초월하는 것이 되었다.


예컨대 우상 숭배나 고행, 카스트를 부인하고 일신숭배 등의 이슬람교(특히 수피파)적인 영향을 많이 볼 수 있다. 카비르 자신이 방직공으로서의 세속적인 직업을 가졌으며, 더구나 힌디의 속어(俗語)로 설법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널리 번져 이윽고 이슬람교의 시칸다르 로디왕(王)과 대립, 여러 나라를 방황한 끝에 죽었다.


그의 작품들은 박티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가라, 가고싶은 대로 가 보라.

베니레스로 마투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세계 전체가

환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형제여, 사랑한느 형제여

<빈 것>이야말로 진리의 심장부이다.



출처

카비르 - 위키백과


참고

카비르와 나나크의 박티운동

박티운동과 수피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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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는 기독교계에서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특징은 우리말로 철학하기에 있다.


또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정식으로 졸업증을 써준 사람은 박영호씨 한명 뿐이지만

그외에 김흥호 목사, 험석헌, 임락경, 이현필등을 가르쳤다.



만년에 구기동 저택을 거니는 다석 유영모



참조

다석 유영모 - 위키백과

류기종의 영성강좌 - 다석 류영모 - 당당뉴스

다석아카데미

다석사상연구회

류영모가 유학을 포기한 이유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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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몬드 투투






198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인물이다.


최근에 <Joy 기쁨의 발견> 이라는 책을

달라이 라마와 함께 합작하여 출판했다.


인종차별문제로 남아프리카가 고심할 때

진실과 화해 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과거 청산을 위해

힘쓰셨다. 이때의 일들은 <용서없이 미래없다>라는 저서에 나와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분들이 많아져서 깔끔하게 과거 청산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님.

두 분 다 에너지장을 보았을 때, 영적 성취를 이루신 분들이다.


참고


달라이 라마와 데스몬드 투투의 대화 - 전성기뉴스

달라이라마의 에너지장

데스몬드 투투의 에너지장

위키: 데즈먼드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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