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는 기독교계에서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특징은 우리말로 철학하기에 있다.


또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정식으로 졸업증을 써준 사람은 박영호씨 한명 뿐이지만

그외에 김흥호 목사, 험석헌, 임락경, 이현필등을 가르쳤다.



만년에 구기동 저택을 거니는 다석 유영모



참조

다석 유영모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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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암스님은 조선조 5백년 역사의 막이 서서히 내려지던 1885년 12월 1일 황해도 백천군 해월면 해암리에서 최사홍(崔四弘)과 전주 이(李)씨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속명은 순천(順天).

  11세 때인 1895년 부친상을 당해 이듬해 출가(出家)를 결행, 경기도 양주군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삭발한 이래 줄곧 수행에 전념해왔다.

  16세 때인 1900년 이보암(李保庵)스님을 은사로, 표금운(表錦雲)스님을 계사(戒師)로 득도하고, 27세 때인 1911년 서해담(徐海曇)스님을 계사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성월(性月)스님 회상(會上)에서 정진하며 화두(話頭)를 간택받았다. 

  그 뒤 만공(滿空), 혜월(彗月), 용성(龍城)스님 등 당시 선지식들을 모시고 용맹정진, 근 6년의 운수행각(雲水行脚)과 좌선(坐禪)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부른 깨달음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語默動靜句 箇中誰敢着
  問我動靜離 卽破器相從

  이를 자유로운 해석으로 우리글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 내게 말도 침묵도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여의고, 한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
  이무렵 스님은 묘향산 상원사(上院寺) 주지와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정암사)주지를 잠깐씩 역임하기도 했으며 45세 때인 1929년, 당시 수덕사 조실(祖室) 만공(滿空)스님으로부터 전법게(傳法偈)와 혜암(惠菴)이란 법호를 받고 법통을 이었다.

  만공스님이 내린 전법게는 


구름과 산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또한 대가(大家)의 가풍(家風)도 없구나
이와 같은 글자 없는 인(印)을
혜암 너에게 주노라.

  雲山無同別
  亦無大家風
  如是無文印
  分付惠菴汝


만공스님의 인가

 덕숭총림 초대 방장 혜암현문(慧庵玄門, 1884∼1985)스님은 1929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을 받은 뒤에도 무섭도록 철저한 정진을 했던 선지식이다. 1943년 만공스님과 간월도로 가는 배 위에서 나눈 법담은 유명하다. 그 자리에서 만공스님은 혜암스님에게 “저 산이 가는가? 이 배가 가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혜암스님은 “산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이 “그러면 무엇이 가는가”라고 묻자 손수건을 말없이 들어 보였다. 이에 만공은 ”자네 살림살이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며 인가해 주었다고 한다. 혜암스님은 1956년 세수 72세 때 수덕사 조실로 추대돼 덕숭산에 주석하며 30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 전통선의 진수를 전하기 위해 1984년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석해 한국불교를 미국에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만공스님은 일제시대 때에 간월도로 가서

우리나라의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위한 천일기도를 입재했습니다. 

아마 그곳에 갈무렵으로 보이네요.


 


참고

혜암선사-행장

혜암현문

혜암스님의 에너지장

만공스님의 천일기도


저서

<생사해탈의 관문 선문촬요>

<바다 밑의 진흙소 달을 물고 뛰네> 법어집

달마대사 혈맥론(e뭣고 선어록총서 1)

달마대사 관심론(e뭣고 선어록총서 2)

보조국사 수심결(e뭣고 선어록총서 3)

보조국사 진심직설(e뭣고 선어록총서 4)

선경어(e뭣고 선어록총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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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과 결핵환자 사랑하다 75세 총각 된
김준호
맨발로 밥을 빌어먹으면서 걸인들의 친구가 되고 폐결핵에 걸려서도 폐결핵 환자들을 돌보는 김준호씨는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의 수제자다. 
그가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나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까지 걸어온 삶은 쾌락과 안락과 좋은 음식과 화려한 의복만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기석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닌다더라’ ‘농사 지으며 길쌈을 하는 등 먹거리와 입을 것을 자급자족한다더라’ ‘평생을 채식하면서 독신으로 살고 쥐나 이도 죽이지 않는다더라’ ‘병들어도 약을 쓰지 않는다더라.’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지난 11월10일 풍문으로만 듣던 ‘기이한 삶’의 주인공을 만난 곳은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100년은 넘어보이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잎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우뚝 서 있는 귀일원의 작은 방에는 고승처럼 생긴 한 노인과 청년처럼 혈색이 좋은 또 다른 노인이 큰절을 하며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맞아들였다.

고승처럼 생긴 노인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닌 오북환 장로(吳北煥·92)였고, 혈색이 좋은 노인은 김준호 선생(金俊鎬·75)이었다. 이 두 노인의 현직을 구태여 따지자면 오장로는 귀일원의 이사장이고 김선생은 귀일원의 이사다. 귀일원은 정신질환자들과 지체인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이 가족처럼 모여사는 공동체다. 지난해 최우수 정신요양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 두 노인은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자선사업가들인가? 귀일원이 생긴 독특한 내력을 살펴보면 두 노인이 단순한 의미의 자선사업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엄두섭 목사가 쓴 ‘맨발의 성자(聖者)’란 책에는 거지와 병자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숨진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이현필이라는 사람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현필씨는 직후에 동광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곳에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수도자들과 이들이 돌보는 과부, 노인, 고아, 걸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사회복지 분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는데 동광원이 이런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동광원이 바로 귀일원의 전신이다. 지금도 종교계에서는 귀일원보다 동광원으로 불린다.

64년에 타계한 이현필씨의 제자는 전국에 50명 정도 되는데 경기도 벽제, 전북 전주·남원·장수, 광주광역시, 전남 화순·함평·진도·비금도·보길도 등지에서 순결 청빈 순명 정신에 입각해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구도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환자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독신으로 살며 살생을 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약 대신 자연적으로 치유하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50대 이상인데 오북환 장로는 이현필씨의 친구이자 제자이며, 김준호씨는 이현필씨가 가장 아끼던 수제자다. 동광원 공동체의 족보를 따지자면 이현필-김준호로 이어지는 셈이다.

김준호씨가 스승인 이현필씨의 인품에 마음 깊이 사로잡힌 것은 23세 때였다. 전남 해남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던 중 밤에 종소리를 듣고 마음이 끌려 찾아간 곳이 수동교회였는데 이곳에서 이현필씨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이현필 선생님과 오북환 장로님이 추운 겨울 새벽에 오셨는데 머리를 깎고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바지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양말도 신지 않았더군요. 종교인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마치 머슴 같았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강대 위에 오르지 않고 마룻바닥에 앉아서 설교를 하시는데 꽃병에 든 국화꽃을 보고 선생님은 몹시 떨리고 슬픈 목소리로 ‘꽃은 핀 자리에 그대로 둔 채 봐야 합니다. 앞으로 꽃을 꺾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의사가 되려는 공부를 포기하고 일생을 이분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준호씨는 이현필씨를 만나러 무작정 광주에 갔지만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이현필씨를 만날 수 없었다. 김씨는 광주에서 거지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중 광주 YMCA에서 이현필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준호씨는 그때부터 이현필씨의 문하생이 됐다. 입문식은 밥을 빌어 오는 일이었다.

“6·25전쟁이 나기 전이었을 겁니다. 비가 장대처럼 죽죽 내리는 날 아침이었는데 선생님은 저보고 밥을 빌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맨발로 근처에서 잘사는 듯이 보이는 부잣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앞에 서서 큰소리로 ‘밥 좀 주세요’라고 외쳤어요. 한참 뒤에 새댁이 나와 밥을 주기에 빈손을 벌였더니 놋그릇째 가져가라고 해요.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새댁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 밥을 들고 선생님께 돌아왔더니 선생님은 맨발로 나와 저를 맞으며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이 밥은 제가 먼저 먹겠습니다’라고 말해요. 그때 선생님이 밥 먹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습니다.”

 

‘다리밑의 물고기를 건져라’

  이현필씨는 김준호씨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걸인 한 명을 스승처럼 붙여줘 같이 다니게 했다. 탁발생활을 몸에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경도 정신이 살아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정신이 죽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제자에게 말보다 실천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이현필씨와 김준호씨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어보면 마치 옛 선승들이 선문답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김준호씨가 광주 시내의 다리 밑에서 10여년간 거지들과 함께 생활한 것도 이현필씨가 던진 한마디 말에서 비롯됐다.

“동광원의 단조로운 공동체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작정 나가버린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겨울이 닥치자 이현필 선생님은 그 아이들이 걱정이 됐는지 ‘상류를 빠져나간 물고기는 하류의 다리 밑에서 건질 수 있을 터인데…’라며 독백하듯이 말씀해요. 저는 그 순간 다리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부랑아들과 함께 살라는 말로 들었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 동광원을 나와 광주 시내 다리 밑에서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걸인들과 함께 동냥도 하고 이들이 병에 걸리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던 김준호씨는, 마치 가톨릭의 데미안 성인이 나환자들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려 죽게 된 것처럼 폐결핵에 걸렸다. 이현필씨는 김준호씨를 동광원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스승은 제자를 직접 간호했지만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쓰지 않는 데다가 영양가 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니까 병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약을 복용하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동광원 공동체가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었다.

제 몸도 돌보지 않고 순회강연을 다니고 틈나는 대로 제자를 간병하던 이현필씨도 마침내 후두결핵염에 걸렸다. 서울의 아현동 굴다리 밑에서 사는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를 희망해 서울에 올라온 이현필씨는 어느날 김준호씨를 서울로 불렀다.

“아현동 굴다리 밑 걸인을 시켜서 굴비를 사오게 하더니 물에 넣어 끓이게 해요. 그리고 그 국물을 당신의 입속에 넣게 하셨어요. 제자 앞에서 파계를 선언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고기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병으로 아픈 제자에게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스스로 파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광주에 있는 제중병원에 입원시켜달라고 하셨어요. 제가 모시고 갔더니 저도 함께 입원을 시키더군요. 그리고 한달 뒤 선생님은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가 다시 육식을 금하고 수도생활과 강연활동을 하시다가 6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무등산의 폐병환자들과 살다

  병원에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김준호씨는 광주 무등산에서 움막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퇴원한 폐결핵 환자들은 이승의 마지막 쉼터로 무등산을 찾았다. 김준호씨는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임종을 지켜봤다.

“움막은 계곡물이 흐르는 근처에 여러개 지었어요. 이들이 마지막 소원인 물을 실컷 먹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전염이 된다면서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극진히 돌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신선한 물을 마시다 보니 병이 완쾌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무등산에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러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무등산에 있는 움막은 무등원이라는 환자들의 공동체로 변했습니다.”

김준호씨는 정부가 폐결핵 환자 요양소를 세우기까지 20년간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동광원 공동체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며 보냈다. 지금은 전북 장수에서 수도생활에 전념하며 가끔씩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구도자들을 만나러 나온다.

스스로 새처럼 산다는 김준호씨는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스승인 이현필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김준호씨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현필씨의 삶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그라고 입을 모은다.

신의 말씀에 따라 자연과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시절에 적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채 독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이냐’ ‘자식이나 손주가 없어 노년에 쓸쓸하지 않으냐’는 우문에 김준호씨는 허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돈은 한푼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나와 생활했던 공동체 식구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고 손주들입니다.”


출처: 신동아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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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성경 넘나드는 道人목사 
김흥호
목사이기 이전에 도인이자 철학자. 35세때 주역을 묵상하다 문득 견성한 동양적 기독교인. 
하루 한끼, 새벽 찬 목욕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해 온 노스승의 悟道頌(오도송).
 
김홍근 <문학박사, 성천문화재단 연구실장> 
 
 

  김흥호(金興浩·81) 교수는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전해온 사람이다.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 귀를 뚫었고(聲聞), 각고의 노력으로 눈을 뚫었으며(緣覺), 자기를 이김으로써 코를 뚫고(菩薩), 평생을 대학강단과 고전연구 모임에서 강의하며 입을 뚫었다(佛陀).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했다는 말은 그가 곧 ‘본(視)’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 그는 견성(見性)을 했기에 관(觀)을 갖게 된 눈 밝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의 본질은 ‘나를 보고 나를 아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는 자신을 보았기에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기를 이기는 힘이며, 외적으로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힘이다. 불교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을 법보시(法布施)라고 하지만, 김교수도 평생을 강의하는 데 바쳤다. 한국 정신계의 선지식(善知識)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지붕 끝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땡그랑땡그랑 울리는 풍경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渾身似球掛虛空 혼신을 다해 허공에 매달려
一等爲他談般若 오로지 이웃을 위해 말씀을 전하네
東風西風南北風 동에서, 서에서, 남북에서 불어올 때마다
滴了滴了滴滴了 딸랑 딸랑 딸딸랑 (여정의 풍영시, 한글 번역은 필자)

그리고 그 고요한 풍경 소리의 여운은 잎이 다 떨어져(樹凋葉落) 발가벗고 서서 늦가을 바람에 알몸을 드러낸 채(體露金風), 시리도록 푸른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가지 위에 매달려 있는 빨간 홍시로 연결된다. 언젠가 젊었을 때 그가 쓴 아래의 글은 이제 팔순 고개를 넘은 그에게 그대로 자화상(自畵像) 같아 보인다.

지붕 위에 감이 새빨갛다. 다 익은 것이다(盡性). 동양 사람들은 다 익은 사람을 인(仁)이라고 한다. 자기 속알(德)을 가진 사람이요, 지붕 위에 높이 달려 있는 감처럼 하늘 나라를 가진 사람이다. 사랑의 단물이 가득 차고 지혜의 햇빛이 반짝이는 높은 가지의 감알, 그것이 어진 사람이다. 완성되어 있는 사람, 성숙해 익은 사람, 된 사람, 다한 사람, 개성을 가진 사람, 있는 곳이 그대로 참인 사람(立處皆眞), 언제나 한가롭고(心無事) 어떤 일에도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事無心), 동양에서는 이런 사람을 사람이라고 한다. 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平常心), 더 준비할 것이 없는 사람(無爲), 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命) 말이 쏟아져 나오고(道)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인이라고 한다. 인은 된 사람이다. (‘생각없는 생각’, 김흥호, 솔刊, p.16)

어질 ‘인(仁)’은 ‘씨’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 알의 감에 성숙한 인격의 이미지를 투영시킨 이 글은 목사인 그가 가슴속에 담고 있는 예수를 그린 것이다. 높은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달린 그 감은 자신을 인간의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그러나 “김흥호 교수의 글은 그 글이 그대로 그 사람임을 나는 믿습니다”고 평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의 말처럼, 수십 년 간 여러 후학에게 말씀의 성찬을 베풀어온 그도 이제 붉고 동그란 단감이 되어 뭇사람의 먹이가 되고 있다.

김흥호의 사람됨을 깊게 이해한 네 사람이 있다.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지기(知己) 안병무와 변선환, 그리고 일본인 선승(禪僧) 마쓰나가다.

먼저 다석은 김흥호의 생명의 은인이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다석 선생은 병상에 누운 청년 김흥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고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계시’라는 뜻의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는 다석이 내려준 것이다. 여러 차례 공동묘지 입구까지 실려갔던 김흥호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지금까지 45년간 병치레를 해본 일이 없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인 안병무와 변선환은 김흥호의 득음(得音)을 알아차린 친구들이다. 평양고보 동창인 안병무는 김흥호가 나이 40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미 깨쳤는데 뭘 고생스럽게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떠나는 친구에게 안병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의 죄인은 목사이니 제발 목사가 되어서 돌아오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흥호는 미국에서 감리교 목사가 되어 돌아온다.

 

“自性을 보았는가?”

  김흥호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던 1950년대 후반부터 같은 학교의 이효재, 이남덕 교수 등과 동양고전 독서회를 조직하여 공부하면서 학생들에게 철학 특강을 했는데, 교목(校牧)이 된 후 강의원고를 풀어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으로 1970년부터 12년간 개인월간지 ‘사색’을 발행한다. 그 잡지의 권두언을 읽던 변선환은 그 글이 ‘김흥호라는 한 한국인의 마음에 비친 그리스도 실존의 모습’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선불교를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쓰의 제자로 미국 시카고 선(Zen)센터 소장으로 있던 마쓰나가는 1970년대 초에 한국의 선사들을 만나보려고 내한했다. 그는 자신을 안내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다,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버틀러대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을 공부하여 일어와 영어가 능통한 김흥호를 소개받았다. 전국의 각 사찰을 일주하며 고승들을 만나보고 서울로 돌아온 마쓰나가는 한국을 떠나기 전 동국대에서 한국의 식자들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데 청중석에서 선문답식의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그 동안 전국 각지를 함께 다니며 숱한 대화를 나누면서 김흥호의 깨달음의 경지를 잘 알게 된 그는 김흥호에게 대신 대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즉석에서 입을 연 김흥호의 거침없는 법담은 좌중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마쓰나가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신문에 한국의 선불교 순례 경험을 기고했다. 그 글에서 그는 한국에 가보니 뜻밖에도 기독교 목사인 김흥호가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소요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적었다.

그 기사는 한국 불교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수좌가 김흥호를 찾아왔다. 김흥호를 점검할 요량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자성(自性)을 보았소?”

김흥호는 대답했다.

“그렇소. 보았지요.”

놀란 승려가 되물었다.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김흥호가 대답했다.

“석가모니는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말문이 막힌 그 승려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돌아가서 어느 불교지에다 김흥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흥호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회 강단 선 14살 평양 고보생

  1919년 황해도 서흥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김흥호는 철이 들면서부터 ‘나는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화두를 품었다. 평양고보에 다니다 방학이 되어 본가가 있던 고향 대동강 두로도(豆老島)에 돌아오면 마을 교회에서는 14살에 불과한 그를 평양고보생 인텔리라 하여 설교를 시켰다. 독립지도자로 활동하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김흥호가 10살 때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해 당신이 세운 교회의 강단에 섰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대중에게 설교를 하는 진땀나는 경험을 한 김흥호는 그 뒤 틈날 때마다 당시 평양과 서울의 교회에 다니면서 유명 목사들의 설교를 기록하였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가 강단에 서기 위해서였다. 이후 평양 남사현 교회에서 이윤영, 이완식, 홍기주, 홍기횡, 최근필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 ‘나가자!’를 듣고 깊이 감동받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남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그는 내심 무척 괴로워한다. ‘진정한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흥호의 기독교 신앙은 변증법적으로 세 차례의 굴곡을 겪는다. 먼저 10대 후반에는 당시 식민지 체제하에서 의기소침해진 한국인들을 고무하기 위해 크게 유행하던 부흥회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 후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다니면서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 강의를 듣고 신앙적으로 새로 눈뜨게 된다. 그는 무교회주의자 선생들의 전집을 탐독하면서 기존 부흥회식 기독교, 즉 ‘유(有)교회적 입장’에서 양심에 따른 지성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무(無)교회적 입장’으로 옮긴다. 이 입장은 후에 다석 유영모를 만나면서 유와 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가온(中)교회적 입장’으로 승화된다. 그는 다석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어릴 때부터 품어온 문제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를 풀게 된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7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다. 생면부지의 서울에서 갖은 고생을 하던 그는 정인보 선생을 찾아가 선생의 소개로 국학대학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강연을 한 후 철학개론 교수로 채용된다. 당시 나이 많은 학생 중에는 ‘주역’을 줄줄 외는 사람도 있고 해서 동양철학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먼저 정인보 선생에게서 양명학을 배운 뒤, 이광수를 찾아간다. 춘원은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고당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온 유영모를 알게 되었는데, 그를 ‘시계 같은 분’으로 부르며 외경하고 있었다(당시 함석헌은 4학년생이었다). 춘원은 김흥호에게 다석을 추천했고, 정인보 선생도 다석에게 찾아가라고 권했다.

1948년 봄 김흥호는 처음으로 유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첫날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후에 이 삼재(三才)사상은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에 핵심을 이룬다.) 김흥호는 다석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씀엔 인격의 무게가 실려 가슴으로 바로바로 육박해 들어왔다. 다름아닌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힘이었다. 김흥호가 본 다석은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정좌를 하고, 평생 걸어만 다녔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참사람(眞人)이었다. 다석(多夕)이란 호에는 하루 세 끼를 저녁에 합쳐 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겨울 아침, 바다에 뛰어들다

  김흥호가 파악한 다석의 실천(道)은 ‘一坐 一仁 一食 一言’의 ‘하루살이’이다. 즉 새벽에는 일어나 꿇어앉아 공부하고,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저녁에는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며, 밤에는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침은 ‘봄’이요 따라서 꿇어앉아 동서의 고전을 ‘보며’, 낮은 ‘여름’이요 따라서 열심히 ‘열음질(농사)’을 하고, 저녁은 ‘가을’이요 따라서 겸허하게 ‘갈무리(추수, 즉 식사)’를 하고, 밤은 ‘겨울’이요 따라서 깊은 잠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다석은 하루를 곧 일생처럼 살았다. 밤마다 십자가에 달리고, 아침마다 부활했다. 그는 그의 정신일기(多夕日誌)에 하루하루를 셈하여 기록하였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언제나 ‘오!(감탄사) 늘(영원)’이었다.

김흥호는 스승이 실천해 보인 그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걸어갔다. 심지어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는 스승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지지 않기 위해, 제자는 피란지 부산과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겨울에 아침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 특별한 사제관계였다.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도인(道人)의 삶이라면, 김흥호의 삶은 바로 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김흥호는 훗날 다석의 도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한 후 이렇게 요약하였다.

一食晝夜通 一言生死通
一坐天地通 一仁有無通

김흥호는 다석을 따라 다닌 지 3년 만인 어느 날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한 다석의 설명을 듣고 귀가 뚫리는 경험을 한다. 그 후 다석은 본인이 67세 되는 날 세상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김흥호는 그 다음날 스승의 장례를 치르려고 댁으로 찾아가던 도중에 길에서 다석을 만났다. 그 순간 김흥호는 세상을 떠난 것은 다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심신이 지극히 쇠진해 있던 김흥호는 어머님의 간절한 권유로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석은 한사코 제자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너무나 병약하던 김흥호는 오로지 쉬고 싶어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다. 이때 그는 신촌에 있던 천막교회를 인수받아 대신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결혼을 했어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주역’에 몰두했다. 매일 한 괘씩 종이 위에 그려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35살 되던 해 3월17일 오전 깨달음을 얻는다. 평소 다석은 한국인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구약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동양의 유불선(儒佛仙) 삼교와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의 근본 오의(奧義)를 회통한 후 그 견처(見處)를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으로 남겼다.

斷斷無爲自然聲 자신을 텅 비웠을 때 자연과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卽心如龜兎成佛 마음의 본체를 깨치면 만물이 부처다
三位復活靈一體 부활한 정신에 성부 성자 성신이 하나의 영으로 빛난다
天圓地方中庸仁 하늘과 땅의 진리는 인간에게서 구현된다 (한글 번역은 필자)

김흥호도 이날부터 일식(一食)에 들어갔다. 그리고 석 달 뒤 ‘대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스승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중용’을 우리말로 옮겨 스승에게 보였다. 그때 마침 다석의 집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이정호 전 대전대 총장이 찾아와 있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이정호 교수에게 자신이 번역한 ‘대학’을 보이며 “이 글은 공자께서 번역하셔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김흥호를 향해 “이것은 김군이 쓰기는 하였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김흥호는 연세대, 이화여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면서 유, 불, 선, 기독교의 주요 경전을 3년간씩 총 12년 동안 읽어나갔다. 1963년 44세 되던 해, 미국으로 교환교수 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동 대학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는 한편 웨슬리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전 미국 감리교단의 비숍(감독)이며 한국 감리교 명예감독이었던 레인즈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인디애나주 감리교회의 정목사로 등록된다.

1970년대에는 난곡 김응섭 선생에게서 서예를 배웠으며 1984년 65세로 이화여대에서 정년 퇴직을 한다. 그해 영국으로 가서 재영국 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귀국,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지금까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1996년 이화여대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2시간 동안 동양고전과 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법화경과 신약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첫 시간에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둘째 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성경 내용이 동양적 정서로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그 동안 강의해온 동양고전은 왕양명의 ‘전습록’ ‘주역’ ‘다석일지’ ‘도덕경’ 등으로 제자들이 구술한 것으로 솔출판사에서 전 30권 분량의 ‘김흥호 전집’으로 발간중이다(현재 6권 발간). ‘견성(見性)한 목사’ 김흥호가 남긴 말은 21세기의 본격적인 종교 교류시대에 지침이 될 것이다.


출처: 신동아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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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파괴하는 말총머리 한의사
김홍경
‘기존 권위는 무시당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김홍경. 사람들은 이런 그를 재야 한의학자, 언더그라운드 강사, 청개구리, 돌팔이 한의사 등으로 부른다. 도올이 잠든 노자를 흔들어 깨웠다면 금오는 앉은뱅이로 굳어 있던 사암을 일으켜 세우는 중이다. 10월30일부터 EBS 방송특강 ‘김홍경이 말하는 동양의학’을 통해 다시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금오(金烏) 김홍경(50). 매주 토요일 있는 방송 녹화시간은 200여 방청석을 가득 메운다.
 
곽대중 <자유기고가>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희끗희끗한 꽁지머리, 다듬지 않은 턱수염, 늘 털털한 생활한복 차림. 왜 머리를 기르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냥 좀 특이해 보이려구요. 아마 세상 사람들이 다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면 그때 전 빡빡 밀고 다닐 걸요” 하면서 호쾌하게 웃는다. 금오는 외모만큼이나 살아온 과정도 독특하다.

일본 오사카 근처에서 광병(狂病) 치료로 이름이 높았던 조부, 명문대학을 나온 부모 슬하에서 그 역시 청소년기에 이른바 ‘서울대병’을 앓아야 했던 사람이다. 서울대 의대를 두 번 떨어지고 꿩 대신 닭으로 선택한 것이 경희대 한의학과.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의학에 대한 주위의 멸시와 천대가 심해 좌절하다, 수석으로 입학한 대학을 꼴찌 문턱에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한의원을 개원하여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돈도 벌었으나 술과 노름에 빠져 약혼녀마저 달아나버리고, 몇 번이나 자살할 생각까지 하였다는 그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방황의 연속이었다.

“돈이 없으니 월급쟁이 생활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마산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던 어느 날, 꿈속에 조부님이 나타나더군요. 발가벗고 요가 자세를 취한 채 붉은 만장을 든 모습이었는데, 그 만장에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사암침법’을 터득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전국을 떠돌며 ‘스승’을 찾아 다녔다. 사암침법은 동의보감의 허준, 사상의학의 이제마와 함께 조선의 3대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사암(舍岩)도인의 전설적인 침법. 그러나 그 해설서라 할 수 있는 ‘침구요결’은 처방이나 응용법은 없이 온통 난해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 한의과 수업시간에도 그저 몇 분만 설명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금오는 주역과 선(禪)을 배우러 다니는 데 주력하였다.

좋은 스승이 있다면 천릿길을 마다않고 달려가 만났던 재야의 스승 중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주역학자 아산 선생과 85년 102세로 입적한 수덕사 방장 혜암 스님. 금오는 이 두 사람을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산 선생에게는 주역을 배웠습니다. 정통으로 입문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거기서 가설, 힌트를 얻어 나왔습니다.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혜암 스님의 선문답(禪問答). 선문답을 탁마하면서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선문답은 알 듯 말 듯 아리송하지만 의외로 답은 대단히 단순합니다. 사람들이 선문답은 골치 아프다고 하는데 답이 너무 코앞에 있어서 못 푸는 겁니다.”

난해했던 ‘침구요결’의 구절들을 하나하나의 원리로 깨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하고 도식화된 이론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게 되니 ‘마음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400년간 주저앉아 있던 사암침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암기 침법이 아닌 원리 침법

  겉으로 볼 때 사암침법은 사용하는 침이 약간 더 굵고, 손과 발에만 시술하는 것, 그리고 약간 비스듬하게 침을 꽂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침법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가느다란 대롱침은 한의학 용어로 이야기하면 보사(補瀉)가 불가능합니다. 보사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사침법(斜針法)으로 경락의 흐름에 따라 시술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모든 침술경전에는 보사를 행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쓰이는 모든 침법은 보사를 무시한 일종의 체침법(온몸에 침을 꽂는 침법)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을 쓰면 어디에 좋다, 어디가 아프면 어디에 침을 놓아라. 이건 완전히 암기식 침법이죠. 진정한 침법은 원리(原理) 침법이 되어야 합니다.”

사암침술의 원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갈 즈음 방랑생활을 정리하고 대학 강단에 서보기도 했고, 종로에 있는 큰 건재 약방의 관리의사, 종로구 한의사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자신의 침술을 알리고 싶은 생각에 친구에게 부탁하여 채용된 곳은 동국대 한의과 대학 외래 임상강사. 그러나 원리에 대한 가르침은 없이 암기만 강요하는 한의학 교육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성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1983년 한 해 만에 물러나야 했다. 약방 직원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방된 약재의 양보다 줄여서 조제하거나 무면허 의사가 진료하는 것을 보다못해 보건소에 고발하는 등 타고난 반골기질로 인해 스무 군데를 옮겨 다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1984년 12월. 1년 동안 그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사암침법을 알고 싶다고 찾아왔다. 열 평 남짓한 약방에 스무 명을 모아놓고 ‘사암도인 침술전수 40일 강좌’라는 이름의 과외수업을 시작하였다. 수가 늘어나 폐교를 빌려 사용하기도 하면서 이어진 것이 현재까지 22차에 걸쳐 30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고 ‘사암 한방의료봉사단’의 요람이 되었다. 지금도 방학 때면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든다. 이제 금오의 40일 강좌는 한의대 학생들의 ‘학점 없는 필수과목’이 되었다고도 한다. 처음엔 한의대 학생들만 수강하다가 이젠 개업 한의사들이나 공대, 법대 출신 등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들도 찾아오고 있다.

합숙훈련 방식으로 진행되는 40일 강좌는 그 수업방식부터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정작 배우고 싶어하는 침술은 가르치지 않고 하루종일 논밭 일을 시키고 해가 저물 때 몇 시간씩 명상 시간을 갖게 한 다음, 밤이 깊어 시작되는 수업은 새벽녘에야 끝난다. 취침시간은 길어야 두세 시간뿐.

“일반인을 상대로 한 강의야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대학생들은 나중에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환자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혹독하게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칩니다. 가르치다 보면 애들이 너무 똑똑해서 탈이라는 걸 느껴요. 한의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지금까지 배워온 것, 고정관념, 이런 걸 다 무시하고 비워둬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면 자기 과거의 기억으로 자꾸 연상하려 들어요. 원리를 따르지 않고 제 지식을 따르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것을 부수는 데 가장 큰 힘을 쏟는 건데, 못 견디면 거의 쫓아내다시피 합니다. 100명 들어와서 열댓 명 남는 수준입니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재야 한의학자, 언더그라운드 강사, 청개구리, 돌팔이 한의사 등으로 부르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죄값은 받아야죠, 뭐. 대학원이나 박사코스 같은 정상적인 과정을 밟지 않았고, 또 그것을 제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약간은 좀 안티 유니버시티하게 대학가의 공부를 거부하고 재야학자들에게 배우러 떠다녔기 때문에 정규코스를 밟은 사람들한테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겁니다.”

 

이론은 배운 다음 잊어 버려라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사암 한방의료봉사단장이라고 불러주면 제일 영광이고, 한의사 김홍경이라고 불러주면 더 영광”이라고 대답하는 금오는, 그러나 한의사라기보다는 오늘도 사람들의 잘못된 건강상식과 사고습관을 질타하는 데 더욱 많은 힘을 쏟으며 돌아다니는 아방가르드에 가깝다. 벌써 10여권의 책을 냈고, 최근에는 밀려드는 강의 청탁을 ‘거절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이론보다는 직관을 강조하고 과거의 권위나 상식에 얽매이지 말라고 주장하는 그의 강의는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저는 이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론을 배운 다음 어느 날은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글을 열심히 써 숙필 단계에 이른 다음에는 다시 생필, 즉 어렸을 때 필법으로 돌아가라고 했거든요. 바둑으로 말하면 정석을 배운 다음에는 지금까지의 정석을 내던져야 응용이 가능한 거죠. 저는 한의학 강의를 쉽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순하다, 심하게는 저질스럽다고도 하는데, 저는 이건 몸에 좋으니 먹어라, 어디가 아플 때는 무엇을 어떻게 먹어라 하는 이런 암기식 한의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한의학을 만들자는 것이고, 제가 이렇게 쉽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기까지는 저 역시 수많은 언어와 이론을 넘어선 고충이 있었습니다.”

파격적인 주장으로 과거의 권위를 흔들면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기존 권위는 무시당해야 마땅하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학문의 시작은 의심 아니겠어요. 의심을 자주 하고 질문을 자주 하는 건 ‘지혜의 시작’입니다. 저는 강의중에도 약이면 독을 한번 생각하고 독이면 약을 한번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탄력성 있는 두뇌를 개발하자는 거죠. 그런데 지금까지의 한의학이나 양방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 있습니다. 정치적인 용어로는 절대주의죠. 저는 좀 상대주의적으로 사고하자, 의심을 가져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달변가다. 질문을 하면 주저없이 대답한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영화와 음악을 두루 예로 들면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금오의 강연을 듣다보면 저절로 흥이 난다. 그가 늘 강조하는 화두(話頭)는 ‘매사를 뒤집어 사고하라. 상식에 매이지 말고 원리에 눈떠라’. 그러나 정작 환자들 앞에서는 웃기고 울리며 진지하게 진료하는 그를 지켜보면 그가 단순히 기존 권위와 질서에 무작정 덤벼드는 돈키호테적 기인(奇人)만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상식파괴하는 말총머리 한의사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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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家수련과 전통무예의 고수
박 현
4살 때부터 산중에서 스승께 호흡법, 무예, 진법, 산차(차력) 등 좌방 도술을 배웠다는 박현씨는 그러나 현실세계에 내려와서는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으로 ‘위장해’ 살아가고 있다.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한국의 도가(道家)는 크게 두 흐름이 있다. 좌방도가와 우방도가가 그것이다. 수레인 몸을 잘 달궈나가면 수레에 탄 마음도 저절로 달궈 깨닫게 된다는 게 좌방도가 수련의 핵심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잘 다스리면 몸인 수레도 달궈진다는 게 우방도가 수련의 고갱이다.

두 흐름의 수련이 마음을 깨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지만, 방법론이 다르다보니 세월이 흐를수록 수련자들의 심성이나 신분도 뚜렷하게 구별됐다. 직접적으로 마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수련의 대중화 작업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좌방도가 사람들은 무예니 진법(陳法, 주변 환경의 기운을 돌리는 술법)이니 산차(차력)를 표면에 들고 세상에 나섰다. 그러다 보니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불이익을 받는 중류층이나 아예 글을 배우지 못한 하층민이 다수 좌방도가에 몰려들었다.

반면에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열중하는 우방도가 사람들은 혼자서 양생법을 익히는 편이었다. 또 이들은 대개 조선의 유가(儒家) 양반층이었으므로 신분상 드러내놓고 도가수련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등이 우방도가 계열에 가까웠던 인물이다.

좌방도가는 그 근본을 고려 말 이비(李裨, 흔히 이고로 잘못 알려져 있음)에게 둔다. 일명 ‘자하선인(紫蝦仙人)’이라 불리는 그는 태백산 구화동에서 살았다 전해지는데, 그때까지 흐트러졌던 수련의 체계를 바로잡아 좌방수련을 중창(重創)했다 한다.

그런데 자하선인이 남긴 좌방 선맥을 정통으로 이어받았다고 분명하게 밝히는 사람이 있다. 현재 ‘바나리’라는 닦음 공동체 모임을 이끄는 박현씨(朴賢·한국학연구소장)가 그 주인공. 고려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현대 지식인인 그가, 무예와 진법 등을 얘기하는 좌방수련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다. 아무튼 그가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한다는 좌방수련의 계보는 도가 역사를 연구하는데 자료적 가치가 있으므로, 다소 길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여말 선초에 ‘부루아니’ 자하선인께서 ‘비루비니’ 공공(空空)선생에게 좌방수련 맥을 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분께서 남긴 글이 요즘 세상에 전해지는 ‘신교총화’라는 책입니다. 공공선생은 ‘아시가비’ 무갑(無甲)선생께 맥을 전하셨고, 다시 ‘마니가비’ 고중(古中)에게 전해집니다. 고중선생은 세상에 격암 남사고(南師古)로 알려진 분으로 제 고향이기도 한 일월산에서 수도하셨는데, 역학 풍수 천문 복서 등에 달통한 사람으로 조선 중기 사회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그 맥을 이은 분이 ‘수바가미’ 은신(隱身)이고, 그 다음이 ‘서이도리’ 삼주(三柱)선생인데 이분이 바로 저의 사조(師祖)입니다. 이분은 한국에서 우방 수련을 표방하는 한 단체의 사조 이야기에도 잠깐 스쳐가듯 등장합니다. 당시만 해도 좌방과 우방이 서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전통은 자하선생께서 정리해 남기신 840자 ‘천부경습유’에 따라, 스승이 4명의 제자에게 맥을 전하는 것입니다. 삼주 사조께서는 ‘큰 대’자 돌림으로 대공(大共) 대초(大草) 대연(大燕) 대전(大全)을 제자로 두었고, 이중 막내인 ‘하나오니’ 대전선생이 그 맥을 받았습니다. 대 자 돌림의 제 사백부님들은 동학전쟁 때 전봉준, 서장옥 계열에 서서 잠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좌방도가 사람들은 고통받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대전선생은 관동(關東)선생께 맥을 전했는데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 스승님은 산와 진법을 하는 사람 정도로만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원(元) 자 돌림의 제자 4사람을 두었는데, 막내인 ‘아라가비’ 원중(元中)이 바로 저입니다. 저는 4살 때(1960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스승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박현씨의 부친이 철부지 어린 아들의 손을 이끌어 좌방수련 ‘도사’에게 맡겼다는 것이 이채로운 대목. 그러나 영해 박씨인 그의 가계(家系)를 훑어보면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의 고조부, 증조부는 동학 활동과 관련해 여기저기 숨어다니다가 조 부대에는 경북 영양의 삼의계곡이란 곳에 은거했다. 수련공부를 한 증조부(박종덕)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버지(박성호)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더 깊은 산골인 일월산 자락으로 들어가 집 한칸 지어놓고 살게 된다. 이때 아버지는 ‘선도(仙道)선생’이 근방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인 박현을 맡긴 것이다. 60년대 초에 선도선생에게 맡겨진 이 어린이는 어떻게 공부했을까?

 

4살 때 입문한 좌방수련

  “처음에는 아버지와 동갑인 맏사형으로부터 글 공부와 호흡 공부를 했어요. 한문은 천자문부터 시작했는데 8살까지 사서삼경을 다 외웠습니다. 그리고 호흡공부를 해 영적인 체험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8살부터 16살까지는 스승님께 본격적인 호흡 공부와 함께 무예, 진법, 의학(치료학)을 배웠고, 그 이후부터는 자력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대중을 상대로 한국학 강의를 하면서 한문 경전을 보지 않고 줄줄 칠판에 써나간다. 어릴 때 외운 경전이 머릿속에 컴퓨터처럼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가의 학문 습득법은 일반인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고 밝힌다. 인체에는 두 눈 외에 보이지 않는 세 개의 눈이 있는데, 이를 활용해 책을 마치 사진촬영하듯 찍어서 머리에 저장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느 책, 몇 페이지 몇째 줄에 무슨 글자가 있는지를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는 것이다. 또 호흡수련을 하면 저절로 뇌가 활성화돼 창조력이나 기억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17살 되던 겨울에 도시로 나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려대에 진학했다. 80년대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의 스승들이 나라가 혼란할 때 외면하지 않았듯이, 또 좌방수련의 현실참여적인 성격 때문에, 그 역시 세상 흐름을 따라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운동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변신해 ‘변증법적 지평의 확대’ ‘민중민주운동론’ ‘한국경제사입문’ 등 10여 종의 책을 집필했다. 그는 이를 ‘제2의 동학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동학의 ‘반봉건’ 운동이 현대의 민주화 운동이요, 동학의 ‘반외세’ 운동이 현대의 자주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90년에 붙잡혀 감옥에 갔다온 뒤 운동권 생활을 마무리짓고, ‘본업’인 좌방수련 계승자 노릇을 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수행법은 당연히 몸을 잘 달구어 마음을 찾아가는 것으로, 입문자인 행자(行子)에서 수인(修人) 수자(修子) 대수자(大修子) 등의 단계가 있다. 이 수련법의 근본은 구궁기로식(九宮氣路息)이라는 호흡법. 1좌(坐)에서 9좌까지의 단계가 있는데, 행자(입문자)가 기초호흡법(지중신주념, 묵룡토주납, 백우중식좌)을 거친 뒤 본격적으로 1좌에서 5좌까지 닦으면 수련이 일단락돼 ‘수인’ 자격을 갖추게 된다.

또 수인이 됐을 때부터 무예와 진법 등을 전수받을 수 있다. 이 역시 몸을 단련시켜 마음으로 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무예에는 구궁휴장, 구궁검식(검법) 등의 이름으로 역시 9단계가 있다. 전통무예에 대한 박현씨의 설명.

“저희는 무예를 안공(安功)이라 부르는데,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에 산에서 수행할 때는 산짐승 때문에 익혔는데, 지금 현대 세상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랑 싸우자고 무예를 익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다만 안공의 자세가 저희 수련회의 기초 행공으로 응용돼 있으므로 필요하면 배울 수는 있겠지요. 저희 식구 가운데는 수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분들에게 무예를 모르는 삶이 좋다고 말합니다.”

 


고구려 벽화에 있는 무예 동작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박현씨 역시 20대 이전 혈기가 왕성한 시절에 스승에게서 배웠던 무예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적이 있다. 그는 웃음을 띠며 “간판을 건 데는 거의 가봤지요” 하면서 “젊은날의 객기(客氣) 아니겠습니까” 하고 어물쩍 넘어간다. 그러나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측량할 수 없는 ‘무예의 고수’임을 부인치 않는다. 박씨는 다만 “세상에 전통무예라는 이름을 건 곳의 행공법과 박현씨가 배운 그것이 다른가”는 질문에는 상당히 다르다는 쪽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수인의 자격으로 박현씨에게 전통 몸공부를 전수받고 있는 서해진씨(도서출판 바나리 대표)의 말.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다른 곳에서 무예를 익혀 지도자 길을 걷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무예 자체가 주인이 아니라 기와 마음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박선생님의 말에 충격을 받아 따라나서게 됐습니다.”

무예는 크게 수행에 초점을 맞춘 내가무예와 건강과 자기보호에 초첨을 둔 외가무예로 나뉜다. 자신의 내부에서 기의 운행체계를 따라, 즉 기가 가는 길을 따라 검이나 춤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 내가무예라면 외부(혹은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추어 표현되는 것이 외가무예다. 이를테면 외가무예인 검도에서 대표적인 동작인 ‘내려치기’는 내가무예에서는 ‘살수(殺手)’라 하여 금기한다. 이는 그 동작이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무예, 즉 기 수련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작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고구려시대 무덤인 삼실총에 그려진, ‘역사상’이란 이름의 벽화가 사실 박현씨가 스승에게 배운 무예의 한 동작인 ‘반역근세’와 똑같다고 한다. 박현씨의 설명.

“반역근세 자세를 취하면 인체의 혈해 영대 등의 기혈이 열리는데, ‘역사상’의 인체를 자세히 보면 바로 그런 혈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어요. 무용총의 무희들도 수련하는 동작으로 해석이 가능하지요.”

박씨는 요즘 앉아서 잠을 잔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자는 것이 편안해서라고 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등을 대고 자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고 화두 같은 말을 던진다. 몸이라는 수레를 달궈 마음을 달구는 것이 왜 중요하고,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지는 그의 저서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에 차분히 밝혀져 있다.

 

출처: 道家수련과 전통무예의 고수 - 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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