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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단상

왜 삶이 이토록 지겨운 것일까요? - 오쇼라즈니쉬

by 하늘의흐름 2009.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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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지겹다고? 그대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그대는 일종의 죽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지겨운 것은 삶이 아니다. 그대는 죽어 있다! 이것이 그대가 지겹다고 느끼는 이유다. 그대는 스스로 책임지기 보다는 모든 책임을 삶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 것이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마음은 이런 게임을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
마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마음은 항상 속죄양을 찾아 낸다. 마음은 매우 무책임하다. 그리고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변화할 수 없다. 삶이 지겹다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그대는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대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대는 최소한도로 살아간다. 미적지근하게 살아간다. 그런까닭에 지겨움을 느끼는 것이다.
삶은 말할 수 없이 황홀하고 짜릿하다. 그러나 이런 맛을 보려면 최선을 다 해 살아야 한다. 미지근한 삶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살아야한다. 뜨겁고 정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의 삶에는 정열이 없다. 이 때 삶은 지겨워진다. 모든 책임은 그대에게 있다. 삶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동물들은 지겨움을 느끼지 않는다. 새, 나무, 강, 산, 별 등은 권태를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지겹다고 느낀다. 이 지겨움을 느끼는 능력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축복이다.
 이 축복이라는 말은 인간이 권태와 엑스터시 사이에서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뜻한다. 인간 외에는 아무도 선택의 자유가 없다. 인간을 제외한 존재계 전체가 황홀경에 있지만 그들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다. 그들의 엑스터시는 이미 정형화된 것이다. 새가 노래하고 나무가 꽃을 피우고 별이 빛난다... 그러나 이 모두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이것은 신의 선물이다. 인간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삶을 지겹다고 느낀다면 모든 책임은 그대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 스스로 지겨운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기쁨에 넘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나는 두 가지 방식의 삶을 다 살아보았다. 이것이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나 역시 수많은 생 동안 그대와 같은 방식으로 살았다. 그리고 나 또한 지겹기 짝이 없었다. 이제 나는 새와 나무들처럼 기쁨에 넘친다. 다만 그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것이 나의 선택이고 자유라는 점이다. 그대의 지복이 자유에서 비롯된 것일 때 그 지복은 깊이를 갖는다. 새와 동물들이 가질 수 없는 엄청난 숭고함을 갖는다. 그들의 지복은 거의 강제로 부과된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만일 자유라 해도 그것이 부과된 것이라면 그 자유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일 그대가 낙원에 살도록 강요받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칼을 든 경비원이 보초를 서고 있다면 그대는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아담과 이브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들은 낙원에서 삶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엇인가 새롭고 참신한 것을 원했다. 그들이 지식의 열매를 따먹은 것은 지겨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권태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강요된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스스로 선택했다면, 설령 감옥을 선택한다 해도 그는 그 곳에서 행복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다.
자유는 소중한 선물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존재는 오직 인간 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영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광을 고통으로 변질시켰다. 항상 지겨운 삶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언제나  지겨운 삶을 선택하는 것일까? 지겨운 삶이 더 안전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정열적인 삶을 원한다면 그대는 위험하게 살아야 한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위험 속에 살아야 한다.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온갖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지겨운 삶을 선택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정열적으로 살기보다는 최소한도로 살아간다. 이런 삶이 위험을 최소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길을 선택하지만 않는다면 삶은 순간마다 경이롭다. 열린 눈을 갖고 정열적으로 산다면, 지성적이고 위험하게 산다면.. 이것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위험하게 살아라! 하고 말한 뜻이다.
내가 위험하게 사는 것이 산야스의 전부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것이다. 순간마다 일어나는 일을 자각하며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아라.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살아라. 위험을 감수하라. 그러면 그대는 주변에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다. 삶이 황홀해진다. 삶이 깊이와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취한 듯이 짜릿하고 황홀한 삶이 전개된다.
순간수간 살아갈 때 그대는 지식에 따라 살지 않는다. 지식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버리고 순간순간 살아갈 때, 매 순간 과거를 죽이면서 살아갈 때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삶을 산다. 어린아이 처럼 사는 것, 이것이 현자(賢者)의 삶이다.
예수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는 한 신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항상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먼지가 그대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방에서 경이로운 일들이 일어난다. 삶은 기적이다. 어떻게 권태를 느낀단 말인가? 삶은 하나의 기적이다! 예측을 불허하는 놀라운 삶이다. 삶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일로 가득하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보디 달마(bidhidharma)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며칠 동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웃음이 멈추지 않아 잠도 잘 수 없었다. 제자와 친구등 모든 사림이 걱정하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왜 웃음을 멈추지 못하십니까? 지금 제 정신입니까? 혹시 이미 미친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이 이런 말을 늘어놓자 보디 달마는 더 크게 웃었다.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해 땅바닥을 데굴 데굴 구르고 있었다. 이윽고 서서히 웃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웃음이라는 특성은 영원히 그와 함께 남았다. 웃음이 그의 독특한 분위기가 되었다.
깨달음의 충격이 흡수되고 어느 정도 웃음이 가라앉았을 때, 그 섬광 같은 경험이 소화되고 난 다음에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웃은 것은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찾고 있었다. 나는 이미 내 안에 있는 것,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는 것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지복이 곧 내 본성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복을 찾고 있었다. 내가 곧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리를 찾고 있었다."
예수가 '나는 길이고 문이며 진리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예수 자신에게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그는 모든 '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길이고 문이며 진리다.
이 말은 예수라는 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나'를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오랫동안 찾고 있던 것이 이미 그대 안에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당장 보디 달마처럼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삶이 지겨워질 필요는 없다.다음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라.

첫번째.
날카로운 사고력을 갖춘 제리가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매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제리가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친구가 말했다.
고민거리가 있어. 사실은, 내게 불알이 세 개나 달렸는데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불알이 세 개라고? 여보게, 우울할 게 없네. 우리 둘이 잘 협조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을걸세."
"어떻게?"
친구가 귀가 번쩍 뜨인다는 듯이 물었다.
"술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내기를 벌이는 거야. 자네와 바텐더의 불알을 합치면 다섯 개라고 말야! 이건 질 수가 없는 게임이라고."
"좋아. 당장 가세."
그래서 그들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제리가 여러 손님들과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분늘 튼 다음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곳애 모든 분들과 내기를 벌이고 싶습니다. 제 친구와 바턴더의 불알을 합치면 다섯 개라고 말입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와 내기에 돈을 걸었다.
제리가 바텐더를 돌아다보니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제리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당신은 돈을 걸고 싶지 않소?"
"전혀 그럴 생각이 없소. 다만 깜짝 놀았을 뿐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까지 불알이 네 개나 달린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요. 나는 불알이 한 개밖에 없단 말입니다."

두번째.
햇살이 따스한 오월의 어느날, 프랑스 파리의 거리에서 중국인이 매춘부를 만나 호텔로 들어갔다. 창문을 열자 상쾌한 산들바람이 들어왔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중국인은 매춘부와 함께 침대로 들어갔다.
한동안 재미를 본 다음 중국인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가씨, 난 이제 지쳤어요."
이렇게 말한 다음 중국인은 창문가로 가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침대 밑으로 들어가서 반대편으로 나오더니 침대로 뛰어올라 다시 뜨거운 관계를 가졌다.
잠시 후 그는 일어나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아가씨, 난 이제 지쳤어요."
그리고는 창문가로 가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가더니 또 반대쪽으로 나왔다.
이런 일이 여섯 번이나 되풀이되자 매춘부는 지쳐 버렸다. 그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아저씨, 난 이제 지쳤어요!"
그녀가 창문가로 가서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침대 밑을 들여다보았다. 그 곳에는 네 명의 다른 중국인이 누워 있었다!

세번째.
한 늙은 남자가 창녀촌에 가서 포주에게 말했다.
"마담, 나는 임질에 걸린 여자를 원하오."
마담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그를 이층의 방으로 올려보냈다. 그리고는 곧 이어 매춘부 한 명을 보냈다. 여자가 방에 들어가 옷을 벗기 시작하자 노인이 물었다.
"너 분명히 임질에 걸렸지?"
"임질이라고요? 무슨 소리예요? 저는 절대로 그런 무서운 병은 없어요!"
그러자 노인이 그녀를 돌려 보냈다.
이번에 마담은 다른 매춘부를 불러 단단히 교육시켰다.
"이층에 올라가면 괴팍한 취미를 가진 노인이 있다. 너는 그에게 임질에 걸렸다고 말해야 한다. 알겠지? 어쨌거나 손님을 만족시켜는 게 우리의 직업이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노인이 여자를 보고 물었다.
"너는 임질균을 갖고 있겠지?"
"물론이죠. 손님이 그런 여자를 원했잖아요."
"좋아. 그럼 일을 시작하자고."
그들이 침대로 들어가 10분 동안 관계를 가졌다. 일이 끝나고 둘이 나란히 누웠을 때 여자가 말했다.
"이봐요, 할아버지, 고백할 게 있는데요. 사실, 저는 임질에 안 걸렸어요."
노인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아가야. 이젠 걸렸으니까!"

-<피타고라스강론2> 중 왜 삶이 이토록 지겨운 것일까요? 에 대한 오쇼라즈니쉬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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