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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탐구/수행자

[수도사/독일] 요한 타울러 (요하네스 타울러)

by 하늘의흐름 2018.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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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타울러

Johannes Tauler (1294?-1361)

“빛나는 박사”

(그림자료출처: http://www.opkorea.org/도미니코회 홈페이지)

 

 

 

 

I. 중세 독일 신비주의와 요한 타울러

 

1. 중세 독일 신비주의의 태동

● 12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세속의 권력과 부를 탐닉하는데 대한 반발로 급진적인 ‘순수 교회’, ‘가난한 교회’ 운동이 일어났으며, 제도적 교회와 성사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신비체험을 강조하는 신앙형태가 번성하였다.

● 제도권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결국 제도권 교회 대신 개인이나 소그룹의 신앙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졌고, 초월자요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에서 내재(內在)하시는 하나님으로 신앙의 축이 옮겨지게 하였으며, 교리보다는 경험을, 이성보다는 직관을 중시하는 풍조를 낳았다.

● 1223년 교황 인노센트 3세는 번성하는 이단사조를 막고자 종교재판을 실시하고, 청빈을 강조하면서도 제도권 교회의 질서를 따르는 프란시스회(1210)와 도미니코회(1216)를 장려하였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는 도미니코회의 걸출한 신학자이며 설교가로서, 자생적 평신도 모임인 베긴회와 베가드회를 중심으로 퍼져 있던 중세 독일 신비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후일 이단성 시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재판진행 과정에서 사망한다.

● 에크하르트의 역할은 그의 뛰어난 두 제자, 하인리히 수소(Henry Suso; 1295-1366)와 요한 타울러(John Tauler; 1300?-1361)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친구들’ 이라는 모임의 영적 지도자들이다.

 

2. 요한 타울러의 영향력

● 타울러의 시대인 14세기는 정치 및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타울러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단하여 스승인 에크하르트를 만난 16세 즈음, 1315 -1317년은 이상기후로 인한 대기근이 발생하여 유럽 전체인구의 10%를 숨지게 하였다. 또한 타울러의 나이 50을 전후로 한 5년간인, 1347 - 1351년에는 유럽일대에 몰아닥친 흑사(Black Death)병으로 인해 유럽 전체인구의 약 30%에 해당하는 3,000만명(교황청 집계 4,300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죽음의 공포는 신의 재앙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지도력에 대한 회의와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합일 욕구가 신비주의 확산을 부추겼으며, 미신적 종파들조차 흥왕하게 되었다.

● '하나님의 친구들'(Friends of God)이라는 운동의 지도자였던 타울러는 후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영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인들이 외적 의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비난하고, 내적 생명력을 중시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하나님의 내재(內在)', '내적 빛'과 같은 표현이 많이 있었다. 루터는 자신이 타울러의 저서라고 생각했던 ‘독일신학’(Theologia Germanica)을 세 차례나 편집하여 출판하였고, 그를 ‘독일교회의 아버지’라고 찬양하였다.

● 타울러의 설교들은 라인 강 유역과 저지대 국가들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었으나, 후에 인쇄되어 어디서나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설교집은 1498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1505년에 아우그스부르그에서 재판되었는데, 마틴 루터도 이것을 구입하여 읽었다. 이 설교집의 출판으로 타울러는 독일 종교계의 영성사에 특유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17-18세기에 있었던 영적 부흥이나 신비주의적 신학 논쟁에서 타울러의 설교들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

● 1548년에 카르투지오회의 수리우스(Laurentius Surius)가 타울러의 설교를 라틴어로 번역한 Pietas Tauleriana 를 펴내며 루터가 타울러에게 깊이 매료되었음을 밝혀, 타울러는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확보한다. 이후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지에서도 큰 환영을 받았다.

● 수리우스는 자신이 출판한 타울러 설교집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울러의 매력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는데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악을 근절하고, 내면의 중심에 주의를 기울이고, 덕을 사모하고, 무절제한 욕망과 자기 고집을 부인하라고 권면했다. 또 많은 장애물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겸손하고 신실하게 따름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마침내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한 영이 된다고 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마음과 혼과 정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16세기에 그의 강론들은 수난을 당한다. 1518년에 예수회에서는 타울러의 저서를 읽지 못하게 했고, 1590년에는 벨기에의 프란치스코회도 그의 저서를 읽지 못하게 했다. 교황 식스투스 6세는 스페인에서 그의 저서를 정죄하고 금서목록에 수록했다. 한편 17세기에는 정적주의(quietism)로 오해받는다. 그의 강론들은 19세기 이후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요한 타울러

● 타울러의 주요 관심사는 에크하르트적인 Pati Deum(이탈과 자기포기에 의한 하나님 체험)에 있으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사 이 세상에 하강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구체적인 형태를 띤다.

● 즉 외부적인 종교적 근행(勤行)이 아닌, 내면의 중심으로 향하라는 가르침은 에크하르트와 동일하지만, 에크하르트가 신의 근저(Gottesgrunt)와 신성(Gottheit)에로 환원하기 위한 돌파(초탈)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여 자칫 ‘자력구원’의 메시지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다고 한다면, 타울러는 자기부인과 이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십자가와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히 강조하고 이를 통해 삼위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 타울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지 않고 강조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模本)이 됨을 강조함으로써, 신비적 경험에 따른 감각적 엑스타시의 집착적 추구를 경계하였다.

● 타울러는 결코 성육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인 그리스도에게로 건너뛰지 않는다. 그는 분명하게 “누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본보기를 지나쳐 넘어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박탈의 구체적 의지인 겸손과 자기인식을 특징으로 하는 하강운동을 강조하였다. 이런 까닭에 ‘낮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그만큼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는 의식이 성립된다.

●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철학적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면, 타울러는 성경말씀과 공식 인증된 성인들의 말씀을 주로 인용하였다.

 

II. 타울러의 생애

● 요한 타울러는 1300년경(1294?)에 학문과 상업 및 교역의 중심지인 도시 스트라스부르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방문한 1314년에 타울러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단하여 정식 수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쾰른의 ‘스투디움 제네랄레’로 파견되어 이동할 때, 타울러도 스승을 따라 쾰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타울러는 하인리히 수소 등의 친구들과 만나게 된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세상을 떠난 1327년에 타울러는 2년 동안 쾰른 대학의 외국인을 위한 강좌에서 신학을 가르치도록 파견되었다.

● 1329년에 타울러는 수도회 신학교수로 스트라스부르그에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도원 성당에서는 열심히 설교했다. 이 젊은 교수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몰두했고 신학의 가르침과 설교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 타울러는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일곱 개의 도미니코 수녀원(각 수녀원에는 100명 정도의 수녀들이 있었다)과 도합 200-300명의 여인들로 추정되는 베긴(Beguin)들의 작은 공동체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 1339년 스트라스부르그의 수도원은 정치적인 이유로 스위스 바젤시로 이사하였고, 타울러는 1339년부터 1343년까지 바젤시에 머문다. 그는 바젤시에서 ‘하나님의 친구들(Friends of God)’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증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 1343년에 장상들은 쾰른의 수도회 대(大)신학교 교수와 설교가로 타울러를 파견했다.

● 1346년에 공동체는 다시 스트라스부르그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도 함께 돌아왔다. 그곳에 돌아왔을 때 장상들은 대중들이 요청한 대로 그가 설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교수직책을 감면해주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와 쾰른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전 지역에서 유명해졌다.

● 1350년에 장상들은 타울러를 다시 한 번 쾰른의 수도원으로 파견했다. 그는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10년을 기도와 설교 및 영적지도에 정진했다.

● 1360년에 타울러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매우 병이 깊어졌다. 이 때문에 장상들은 그를 다시 한 번 그의 출신 수도원인 스트라스부르그 수도원으로 파견했고, 그곳에서 형제들은 그를 정성껏 돌보았다. 몇 달 후인 1361년 5월 17일에 타울러는 거룩하게 생을 마쳤다.

 

III. 타울러의 가르침

● 그는 종교에 있어서 외적인 의식을 존중하는 것을 지양(止揚)하고, 하나님은 오로지 마음에 내재하신다고 말하며, 내적 생명력을 강조했다. 그는 그 자신이 먼저 경건한 생활의 모범을 보였으며, 단순한 신앙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회개를 강조했다.

● 타울러의 신비주의의 핵심은 ‘하나님 본성의 직관’, 즉 ‘복된 관상’ 내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복된 지식’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는 이 가르침을 성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받아들였고, ‘신적 지식은 완전한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추구하여야 한다’고 함으로써 더욱 발전시켰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신다. 그러나 인간적이고, 죄스러운 행위가 중단될 때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탄생하실 수 있다. 이러한 탄생은 인간 본성을 훨씬 높게 들어 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으로 도움을 받는다.

● 우리가 ‘영의 적나라함(비움)’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을 부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체험하지도 못한다. 관상의 본질은 바로 영의 적나라함에 이르는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분을 아는 것은 창조물의 유비의 방법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출중함의 방법으로 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성이 모든 감각적이고 지성적인 영상들로부터 완전히 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관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 오직 영의 적나라함(비움)을 통하여 지성은 충분히 소극적이고 수용적이 되어 하나님과 친숙한 일치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세 단계로 살아간다. 감각적이고 지성적이며 보다 높은 단계인 정신의 단계에서 살아간다.

● 극기와 포기의 방법에 의해서 인간은 영혼의 중심인 깊은 곳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적극적인 수행을 통하여 보다 낮은 욕구들로부터 초탈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응함을 전제로 한다.

● 영혼의 깊은 곳은 신비적 체험을 할 수 있는 영역이며 지성과 의지가 그것을 접할 수 없으므로 관상적 체험은 영혼의 자연적 기능들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 이것은 각자가 영혼의 중심인 ‘마음속 깊은 곳’(영혼의 근저)으로 귀환할 때 성취된다. 거기에 삼위일체께서 거하신다. 그러나 지성과 의지는 삼위일체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그 깊은 곳’(근저)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성령의 두 선물들인 이해와 지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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