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인과 결핵환자 사랑하다 75세 총각 된
김준호
맨발로 밥을 빌어먹으면서 걸인들의 친구가 되고 폐결핵에 걸려서도 폐결핵 환자들을 돌보는 김준호씨는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이현필 선생’의 수제자다. 
그가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나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까지 걸어온 삶은 쾌락과 안락과 좋은 음식과 화려한 의복만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기석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닌다더라’ ‘농사 지으며 길쌈을 하는 등 먹거리와 입을 것을 자급자족한다더라’ ‘평생을 채식하면서 독신으로 살고 쥐나 이도 죽이지 않는다더라’ ‘병들어도 약을 쓰지 않는다더라.’

여러 곳을 수소문한 끝에 지난 11월10일 풍문으로만 듣던 ‘기이한 삶’의 주인공을 만난 곳은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귀일원(歸一院)이었다. 늦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100년은 넘어보이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잎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우뚝 서 있는 귀일원의 작은 방에는 고승처럼 생긴 한 노인과 청년처럼 혈색이 좋은 또 다른 노인이 큰절을 하며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맞아들였다.

고승처럼 생긴 노인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닌 오북환 장로(吳北煥·92)였고, 혈색이 좋은 노인은 김준호 선생(金俊鎬·75)이었다. 이 두 노인의 현직을 구태여 따지자면 오장로는 귀일원의 이사장이고 김선생은 귀일원의 이사다. 귀일원은 정신질환자들과 지체인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이 가족처럼 모여사는 공동체다. 지난해 최우수 정신요양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 두 노인은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자선사업가들인가? 귀일원이 생긴 독특한 내력을 살펴보면 두 노인이 단순한 의미의 자선사업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엄두섭 목사가 쓴 ‘맨발의 성자(聖者)’란 책에는 거지와 병자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숨진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이현필이라는 사람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현필씨는 직후에 동광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곳에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수도자들과 이들이 돌보는 과부, 노인, 고아, 걸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사회복지 분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는데 동광원이 이런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동광원이 바로 귀일원의 전신이다. 지금도 종교계에서는 귀일원보다 동광원으로 불린다.

64년에 타계한 이현필씨의 제자는 전국에 50명 정도 되는데 경기도 벽제, 전북 전주·남원·장수, 광주광역시, 전남 화순·함평·진도·비금도·보길도 등지에서 순결 청빈 순명 정신에 입각해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구도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환자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독신으로 살며 살생을 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약 대신 자연적으로 치유하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50대 이상인데 오북환 장로는 이현필씨의 친구이자 제자이며, 김준호씨는 이현필씨가 가장 아끼던 수제자다. 동광원 공동체의 족보를 따지자면 이현필-김준호로 이어지는 셈이다.

김준호씨가 스승인 이현필씨의 인품에 마음 깊이 사로잡힌 것은 23세 때였다. 전남 해남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던 중 밤에 종소리를 듣고 마음이 끌려 찾아간 곳이 수동교회였는데 이곳에서 이현필씨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이현필 선생님과 오북환 장로님이 추운 겨울 새벽에 오셨는데 머리를 깎고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바지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어요. 양말도 신지 않았더군요. 종교인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마치 머슴 같았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강대 위에 오르지 않고 마룻바닥에 앉아서 설교를 하시는데 꽃병에 든 국화꽃을 보고 선생님은 몹시 떨리고 슬픈 목소리로 ‘꽃은 핀 자리에 그대로 둔 채 봐야 합니다. 앞으로 꽃을 꺾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는 의사가 되려는 공부를 포기하고 일생을 이분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준호씨는 이현필씨를 만나러 무작정 광주에 갔지만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이현필씨를 만날 수 없었다. 김씨는 광주에서 거지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중 광주 YMCA에서 이현필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준호씨는 그때부터 이현필씨의 문하생이 됐다. 입문식은 밥을 빌어 오는 일이었다.

“6·25전쟁이 나기 전이었을 겁니다. 비가 장대처럼 죽죽 내리는 날 아침이었는데 선생님은 저보고 밥을 빌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맨발로 근처에서 잘사는 듯이 보이는 부잣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앞에 서서 큰소리로 ‘밥 좀 주세요’라고 외쳤어요. 한참 뒤에 새댁이 나와 밥을 주기에 빈손을 벌였더니 놋그릇째 가져가라고 해요.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새댁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 밥을 들고 선생님께 돌아왔더니 선생님은 맨발로 나와 저를 맞으며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이 밥은 제가 먼저 먹겠습니다’라고 말해요. 그때 선생님이 밥 먹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습니다.”

 

‘다리밑의 물고기를 건져라’

  이현필씨는 김준호씨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기보다는 걸인 한 명을 스승처럼 붙여줘 같이 다니게 했다. 탁발생활을 몸에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경도 정신이 살아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정신이 죽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제자에게 말보다 실천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이현필씨와 김준호씨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어보면 마치 옛 선승들이 선문답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김준호씨가 광주 시내의 다리 밑에서 10여년간 거지들과 함께 생활한 것도 이현필씨가 던진 한마디 말에서 비롯됐다.

“동광원의 단조로운 공동체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작정 나가버린 청소년들이 있었어요. 겨울이 닥치자 이현필 선생님은 그 아이들이 걱정이 됐는지 ‘상류를 빠져나간 물고기는 하류의 다리 밑에서 건질 수 있을 터인데…’라며 독백하듯이 말씀해요. 저는 그 순간 다리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부랑아들과 함께 살라는 말로 들었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 동광원을 나와 광주 시내 다리 밑에서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걸인들과 함께 동냥도 하고 이들이 병에 걸리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하던 김준호씨는, 마치 가톨릭의 데미안 성인이 나환자들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려 죽게 된 것처럼 폐결핵에 걸렸다. 이현필씨는 김준호씨를 동광원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스승은 제자를 직접 간호했지만 병원에서 치료도 받지 않고 약도 쓰지 않는 데다가 영양가 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니까 병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약을 복용하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동광원 공동체가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었다.

제 몸도 돌보지 않고 순회강연을 다니고 틈나는 대로 제자를 간병하던 이현필씨도 마침내 후두결핵염에 걸렸다. 서울의 아현동 굴다리 밑에서 사는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기를 희망해 서울에 올라온 이현필씨는 어느날 김준호씨를 서울로 불렀다.

“아현동 굴다리 밑 걸인을 시켜서 굴비를 사오게 하더니 물에 넣어 끓이게 해요. 그리고 그 국물을 당신의 입속에 넣게 하셨어요. 제자 앞에서 파계를 선언한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고기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병으로 아픈 제자에게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스스로 파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광주에 있는 제중병원에 입원시켜달라고 하셨어요. 제가 모시고 갔더니 저도 함께 입원을 시키더군요. 그리고 한달 뒤 선생님은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가 다시 육식을 금하고 수도생활과 강연활동을 하시다가 6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무등산의 폐병환자들과 살다

  병원에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김준호씨는 광주 무등산에서 움막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퇴원한 폐결핵 환자들은 이승의 마지막 쉼터로 무등산을 찾았다. 김준호씨는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임종을 지켜봤다.

“움막은 계곡물이 흐르는 근처에 여러개 지었어요. 이들이 마지막 소원인 물을 실컷 먹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전염이 된다면서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했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극진히 돌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신선한 물을 마시다 보니 병이 완쾌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무등산에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러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무등산에 있는 움막은 무등원이라는 환자들의 공동체로 변했습니다.”

김준호씨는 정부가 폐결핵 환자 요양소를 세우기까지 20년간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동광원 공동체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며 보냈다. 지금은 전북 장수에서 수도생활에 전념하며 가끔씩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구도자들을 만나러 나온다.

스스로 새처럼 산다는 김준호씨는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스승인 이현필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김준호씨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이현필씨의 삶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그라고 입을 모은다.

신의 말씀에 따라 자연과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의 삶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시절에 적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채 독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이냐’ ‘자식이나 손주가 없어 노년에 쓸쓸하지 않으냐’는 우문에 김준호씨는 허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돈은 한푼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나와 생활했던 공동체 식구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고 손주들입니다.”


출처: 신동아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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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성경 넘나드는 道人목사 
김흥호
목사이기 이전에 도인이자 철학자. 35세때 주역을 묵상하다 문득 견성한 동양적 기독교인. 
하루 한끼, 새벽 찬 목욕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해 온 노스승의 悟道頌(오도송).
 
김홍근 <문학박사, 성천문화재단 연구실장> 
 
 

  김흥호(金興浩·81) 교수는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전해온 사람이다.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 귀를 뚫었고(聲聞), 각고의 노력으로 눈을 뚫었으며(緣覺), 자기를 이김으로써 코를 뚫고(菩薩), 평생을 대학강단과 고전연구 모임에서 강의하며 입을 뚫었다(佛陀).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했다는 말은 그가 곧 ‘본(視)’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 그는 견성(見性)을 했기에 관(觀)을 갖게 된 눈 밝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의 본질은 ‘나를 보고 나를 아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는 자신을 보았기에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기를 이기는 힘이며, 외적으로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힘이다. 불교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을 법보시(法布施)라고 하지만, 김교수도 평생을 강의하는 데 바쳤다. 한국 정신계의 선지식(善知識)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지붕 끝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땡그랑땡그랑 울리는 풍경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渾身似球掛虛空 혼신을 다해 허공에 매달려
一等爲他談般若 오로지 이웃을 위해 말씀을 전하네
東風西風南北風 동에서, 서에서, 남북에서 불어올 때마다
滴了滴了滴滴了 딸랑 딸랑 딸딸랑 (여정의 풍영시, 한글 번역은 필자)

그리고 그 고요한 풍경 소리의 여운은 잎이 다 떨어져(樹凋葉落) 발가벗고 서서 늦가을 바람에 알몸을 드러낸 채(體露金風), 시리도록 푸른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가지 위에 매달려 있는 빨간 홍시로 연결된다. 언젠가 젊었을 때 그가 쓴 아래의 글은 이제 팔순 고개를 넘은 그에게 그대로 자화상(自畵像) 같아 보인다.

지붕 위에 감이 새빨갛다. 다 익은 것이다(盡性). 동양 사람들은 다 익은 사람을 인(仁)이라고 한다. 자기 속알(德)을 가진 사람이요, 지붕 위에 높이 달려 있는 감처럼 하늘 나라를 가진 사람이다. 사랑의 단물이 가득 차고 지혜의 햇빛이 반짝이는 높은 가지의 감알, 그것이 어진 사람이다. 완성되어 있는 사람, 성숙해 익은 사람, 된 사람, 다한 사람, 개성을 가진 사람, 있는 곳이 그대로 참인 사람(立處皆眞), 언제나 한가롭고(心無事) 어떤 일에도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事無心), 동양에서는 이런 사람을 사람이라고 한다. 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平常心), 더 준비할 것이 없는 사람(無爲), 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命) 말이 쏟아져 나오고(道)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인이라고 한다. 인은 된 사람이다. (‘생각없는 생각’, 김흥호, 솔刊, p.16)

어질 ‘인(仁)’은 ‘씨’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 알의 감에 성숙한 인격의 이미지를 투영시킨 이 글은 목사인 그가 가슴속에 담고 있는 예수를 그린 것이다. 높은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달린 그 감은 자신을 인간의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그러나 “김흥호 교수의 글은 그 글이 그대로 그 사람임을 나는 믿습니다”고 평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의 말처럼, 수십 년 간 여러 후학에게 말씀의 성찬을 베풀어온 그도 이제 붉고 동그란 단감이 되어 뭇사람의 먹이가 되고 있다.

김흥호의 사람됨을 깊게 이해한 네 사람이 있다.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지기(知己) 안병무와 변선환, 그리고 일본인 선승(禪僧) 마쓰나가다.

먼저 다석은 김흥호의 생명의 은인이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다석 선생은 병상에 누운 청년 김흥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고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계시’라는 뜻의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는 다석이 내려준 것이다. 여러 차례 공동묘지 입구까지 실려갔던 김흥호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지금까지 45년간 병치레를 해본 일이 없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인 안병무와 변선환은 김흥호의 득음(得音)을 알아차린 친구들이다. 평양고보 동창인 안병무는 김흥호가 나이 40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미 깨쳤는데 뭘 고생스럽게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떠나는 친구에게 안병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의 죄인은 목사이니 제발 목사가 되어서 돌아오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흥호는 미국에서 감리교 목사가 되어 돌아온다.

 

“自性을 보았는가?”

  김흥호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던 1950년대 후반부터 같은 학교의 이효재, 이남덕 교수 등과 동양고전 독서회를 조직하여 공부하면서 학생들에게 철학 특강을 했는데, 교목(校牧)이 된 후 강의원고를 풀어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으로 1970년부터 12년간 개인월간지 ‘사색’을 발행한다. 그 잡지의 권두언을 읽던 변선환은 그 글이 ‘김흥호라는 한 한국인의 마음에 비친 그리스도 실존의 모습’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선불교를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쓰의 제자로 미국 시카고 선(Zen)센터 소장으로 있던 마쓰나가는 1970년대 초에 한국의 선사들을 만나보려고 내한했다. 그는 자신을 안내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다,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버틀러대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을 공부하여 일어와 영어가 능통한 김흥호를 소개받았다. 전국의 각 사찰을 일주하며 고승들을 만나보고 서울로 돌아온 마쓰나가는 한국을 떠나기 전 동국대에서 한국의 식자들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데 청중석에서 선문답식의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그 동안 전국 각지를 함께 다니며 숱한 대화를 나누면서 김흥호의 깨달음의 경지를 잘 알게 된 그는 김흥호에게 대신 대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즉석에서 입을 연 김흥호의 거침없는 법담은 좌중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마쓰나가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신문에 한국의 선불교 순례 경험을 기고했다. 그 글에서 그는 한국에 가보니 뜻밖에도 기독교 목사인 김흥호가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소요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적었다.

그 기사는 한국 불교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수좌가 김흥호를 찾아왔다. 김흥호를 점검할 요량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자성(自性)을 보았소?”

김흥호는 대답했다.

“그렇소. 보았지요.”

놀란 승려가 되물었다.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김흥호가 대답했다.

“석가모니는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말문이 막힌 그 승려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돌아가서 어느 불교지에다 김흥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흥호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교회 강단 선 14살 평양 고보생

  1919년 황해도 서흥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김흥호는 철이 들면서부터 ‘나는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화두를 품었다. 평양고보에 다니다 방학이 되어 본가가 있던 고향 대동강 두로도(豆老島)에 돌아오면 마을 교회에서는 14살에 불과한 그를 평양고보생 인텔리라 하여 설교를 시켰다. 독립지도자로 활동하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김흥호가 10살 때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해 당신이 세운 교회의 강단에 섰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대중에게 설교를 하는 진땀나는 경험을 한 김흥호는 그 뒤 틈날 때마다 당시 평양과 서울의 교회에 다니면서 유명 목사들의 설교를 기록하였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가 강단에 서기 위해서였다. 이후 평양 남사현 교회에서 이윤영, 이완식, 홍기주, 홍기횡, 최근필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 ‘나가자!’를 듣고 깊이 감동받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남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그는 내심 무척 괴로워한다. ‘진정한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흥호의 기독교 신앙은 변증법적으로 세 차례의 굴곡을 겪는다. 먼저 10대 후반에는 당시 식민지 체제하에서 의기소침해진 한국인들을 고무하기 위해 크게 유행하던 부흥회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 후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다니면서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 강의를 듣고 신앙적으로 새로 눈뜨게 된다. 그는 무교회주의자 선생들의 전집을 탐독하면서 기존 부흥회식 기독교, 즉 ‘유(有)교회적 입장’에서 양심에 따른 지성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무(無)교회적 입장’으로 옮긴다. 이 입장은 후에 다석 유영모를 만나면서 유와 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가온(中)교회적 입장’으로 승화된다. 그는 다석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어릴 때부터 품어온 문제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를 풀게 된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7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다. 생면부지의 서울에서 갖은 고생을 하던 그는 정인보 선생을 찾아가 선생의 소개로 국학대학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강연을 한 후 철학개론 교수로 채용된다. 당시 나이 많은 학생 중에는 ‘주역’을 줄줄 외는 사람도 있고 해서 동양철학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먼저 정인보 선생에게서 양명학을 배운 뒤, 이광수를 찾아간다. 춘원은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고당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온 유영모를 알게 되었는데, 그를 ‘시계 같은 분’으로 부르며 외경하고 있었다(당시 함석헌은 4학년생이었다). 춘원은 김흥호에게 다석을 추천했고, 정인보 선생도 다석에게 찾아가라고 권했다.

1948년 봄 김흥호는 처음으로 유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첫날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후에 이 삼재(三才)사상은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에 핵심을 이룬다.) 김흥호는 다석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씀엔 인격의 무게가 실려 가슴으로 바로바로 육박해 들어왔다. 다름아닌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힘이었다. 김흥호가 본 다석은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정좌를 하고, 평생 걸어만 다녔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참사람(眞人)이었다. 다석(多夕)이란 호에는 하루 세 끼를 저녁에 합쳐 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겨울 아침, 바다에 뛰어들다

  김흥호가 파악한 다석의 실천(道)은 ‘一坐 一仁 一食 一言’의 ‘하루살이’이다. 즉 새벽에는 일어나 꿇어앉아 공부하고,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저녁에는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며, 밤에는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침은 ‘봄’이요 따라서 꿇어앉아 동서의 고전을 ‘보며’, 낮은 ‘여름’이요 따라서 열심히 ‘열음질(농사)’을 하고, 저녁은 ‘가을’이요 따라서 겸허하게 ‘갈무리(추수, 즉 식사)’를 하고, 밤은 ‘겨울’이요 따라서 깊은 잠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다석은 하루를 곧 일생처럼 살았다. 밤마다 십자가에 달리고, 아침마다 부활했다. 그는 그의 정신일기(多夕日誌)에 하루하루를 셈하여 기록하였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언제나 ‘오!(감탄사) 늘(영원)’이었다.

김흥호는 스승이 실천해 보인 그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걸어갔다. 심지어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는 스승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지지 않기 위해, 제자는 피란지 부산과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겨울에 아침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 특별한 사제관계였다.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도인(道人)의 삶이라면, 김흥호의 삶은 바로 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김흥호는 훗날 다석의 도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한 후 이렇게 요약하였다.

一食晝夜通 一言生死通
一坐天地通 一仁有無通

김흥호는 다석을 따라 다닌 지 3년 만인 어느 날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한 다석의 설명을 듣고 귀가 뚫리는 경험을 한다. 그 후 다석은 본인이 67세 되는 날 세상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김흥호는 그 다음날 스승의 장례를 치르려고 댁으로 찾아가던 도중에 길에서 다석을 만났다. 그 순간 김흥호는 세상을 떠난 것은 다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심신이 지극히 쇠진해 있던 김흥호는 어머님의 간절한 권유로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석은 한사코 제자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너무나 병약하던 김흥호는 오로지 쉬고 싶어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다. 이때 그는 신촌에 있던 천막교회를 인수받아 대신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결혼을 했어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주역’에 몰두했다. 매일 한 괘씩 종이 위에 그려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35살 되던 해 3월17일 오전 깨달음을 얻는다. 평소 다석은 한국인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구약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동양의 유불선(儒佛仙) 삼교와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의 근본 오의(奧義)를 회통한 후 그 견처(見處)를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으로 남겼다.

斷斷無爲自然聲 자신을 텅 비웠을 때 자연과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卽心如龜兎成佛 마음의 본체를 깨치면 만물이 부처다
三位復活靈一體 부활한 정신에 성부 성자 성신이 하나의 영으로 빛난다
天圓地方中庸仁 하늘과 땅의 진리는 인간에게서 구현된다 (한글 번역은 필자)

김흥호도 이날부터 일식(一食)에 들어갔다. 그리고 석 달 뒤 ‘대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스승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중용’을 우리말로 옮겨 스승에게 보였다. 그때 마침 다석의 집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이정호 전 대전대 총장이 찾아와 있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이정호 교수에게 자신이 번역한 ‘대학’을 보이며 “이 글은 공자께서 번역하셔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김흥호를 향해 “이것은 김군이 쓰기는 하였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김흥호는 연세대, 이화여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면서 유, 불, 선, 기독교의 주요 경전을 3년간씩 총 12년 동안 읽어나갔다. 1963년 44세 되던 해, 미국으로 교환교수 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동 대학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는 한편 웨슬리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전 미국 감리교단의 비숍(감독)이며 한국 감리교 명예감독이었던 레인즈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인디애나주 감리교회의 정목사로 등록된다.

1970년대에는 난곡 김응섭 선생에게서 서예를 배웠으며 1984년 65세로 이화여대에서 정년 퇴직을 한다. 그해 영국으로 가서 재영국 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귀국,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지금까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1996년 이화여대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2시간 동안 동양고전과 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법화경과 신약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첫 시간에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둘째 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성경 내용이 동양적 정서로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그 동안 강의해온 동양고전은 왕양명의 ‘전습록’ ‘주역’ ‘다석일지’ ‘도덕경’ 등으로 제자들이 구술한 것으로 솔출판사에서 전 30권 분량의 ‘김흥호 전집’으로 발간중이다(현재 6권 발간). ‘견성(見性)한 목사’ 김흥호가 남긴 말은 21세기의 본격적인 종교 교류시대에 지침이 될 것이다.


출처: 신동아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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