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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야독

[그리스도교] 익명의 수사가 쓴 수덕서

by 하늘의흐름 2019.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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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인 삶의 발견 - 8점
익명의 성 베네딕도회 수사 지음, 추교윤 옮김/가톨릭출판사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

 올해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영적 독서를 하기 위해 골랐습니다. 영적 독서란 영혼에 유익이 되는 독서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적인 삶의 발견>, <소화 데레사 자서전>, <준주성범>, <무지의 구름>, <영혼의 성>, <완덕의 길>, <어둔 밤>, <가르멜의 산길> 등 영적인 고전들부터 해서 <예수님의 눈으로>, 김수환 추기경님의 글, 신부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 기타 목회자들이 쓴 저서들을 읽는 행위가 영적 독서에 해당합니다.

 

 다만 영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은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반드시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지만, 신앙적인 것에서는 반드시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신이 존재해야지만, 신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의심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만, 신앙적인 것은 믿는 것을 귀히 여깁니다. 따라서 영적인 것이 옳다. 신앙적인 것이 옳다. 하는 차원의 문제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를 뿐이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닙니다.


 수덕이란 용어는 덕을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친숙한 표현으로 도를 닦는다는 말로 바꿀 수 있겠지요. 가톨릭 수도자에게 중요시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열매 맺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 열매를 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덕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완성에 가까워지도록 다듬는 것이지요.



책에서 안 와 닿았던 내용

 사랑은 저에게 잘 와닿지 않는 단어입니다. 사랑은 Love를 생각나게 하고, 그것은 거룩함보다는 번식을 먼저 생각나게 합니다. 사실 자비라고 하면 한마음에 알아듣게 됩니다. 자비에는 사심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사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면, 자비라는 말로 다시 한번 걸러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하느님과 번식하라'는 말은 될 수가 없잖아요? 영적으로 해석하자면 하느님의 말씀을 익히고 하느님의 제자를 많이 만들어라라는 뜻은 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가톨릭서적이다보니까, 가톨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긴 하지만, 저는 별로 공감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팔은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굽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을 끌어 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경에는 구부리고자 하면, 일단 펴야한다는 구절이 있지요.[각주:1] 본질적으로 가톨릭이다. 개신교다. 안식교도다. 유대교도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가.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진실되이 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면서 나는 가톨릭이니까 그분께서 다 용서하시리라. 이러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웃뿐만 아니라 자기자신도 폭행하는 것이며, 나아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속이려는 사람이라도 성령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와 닿왔던 내용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겸손함에 깊은 감동을 받은 어떤 젊은이가 프란치스코를 '성인'이라 부르며 달려갔습니다. 몹시 화가 난 프란치스코는 돌아서서 그 사람 앞으로 갔습니다. "왜 나를 성인이라 부릅니까?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지 않으면 오늘밤 나는 매춘녀와 잘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73p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마음이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에게 서스럼없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프란치스코는 매춘녀와 잠을 자지 않았지요. 자기 자신을 잘 인지하고 있음은 영적으로 중요한 안목이라고 봅니다. 자기가 대체 뭘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온갖 일들을 벌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 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위하여, "주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그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관상기도 파트도 또한 마음에 들었습니다. 관상기도는 묵상기도, 침묵기도하고도 연결됩니다. 관상기도란 고요히 앉아서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염송기도와는 다르게 수동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맛들이기만 하면, 그만한 은총 또한 없습니다. 관상기도로부터 내려오는 침묵의 은총은 다른 데서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고귀하고 또한 소중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보여주는 광란의 기도-방언기도라고 하는-와는 다른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사실 불교적인 색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선(禪)불교 하고도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이 불자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불교도도 없고, 기독교도도 없고 전부 사람일 뿐 입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두루 어여삐 여기시지만,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보름달 앞에서 한 사람은 불평을 하고, 한 사람은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총평

 다시 읽을 생각이 있습니다. 내년 사순시기 때에 다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1. 도덕경 22장 : 이지러진 것은 온전해지고, 굽은 것은 펴진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폐則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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